1. 대학의 차원은 일차원이 아니다


통용되는 팔조목에 대한 그림은,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 또는

'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이다.  

'화살표(→)구도'가 아니면 '더하기(+)' 구도, 또는 이 둘의 혼합구도인데, 이러한 구도는 대학의 본뜻을 왜곡하는 구도이다. 저러한 구도를 고집하는 한, 또는 저런 구도 속에 있는 한, 대학은 유학의 경서로서 가치가 없다고 감히 말한다. 화살표나 더하기표만으로 사람의 일상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팔조목의 저러한 구도하에서, 대학의 '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옹호하는 사람이 있고, 배척하는 사람도 있다. 같은 논리 같은 구도인데 어떤 이는 옹호하고 어떤 이는 배척한다면 저 논리와 구도에 문제가 있든가, 아니면 저 구도가 관념의 놀음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일찍이 저 구도 저 논리에 문제가 있는 상황을 만났기에 풀려고 노력하였다.

문제가 있다고 의심하는 저 구도는 일차원 線(선)의 구도이다. 저 선의 구도에서 문제가 있다면 차원을 달리하여 살필 필요가 있다. 나이 여덟 아홉 소학교 학생도 구구단을 익힌다. 더하기로만 세상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소개하는 저 공식은, 통용하는 대학의 이해가 지닌 문제를, 차원을 달리하여 푼 것이다. 외형상으로도, 저 공식은, 적어도, 대학이 일차원적인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2. 공식에 따른 조목의 분류


가. [  ]-각괄호, (  )-둥근괄호의 구분

아래 공식의 그림 속에서 [  ], (  )를 기준으로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은 대학 이해에 중요하다.

가1. [  ]-각괄호 안의 내용은 '나 자신을 어찌하는 행위'

[  ] 안 조목들은 '동사+목적어' 형식을 한 낱말의 조합이다. 목적어가 되는 意 知 身 / 心은 모두 명덕(으로 표현된 마음)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意 知 身은 흔히들 말하고 있는 知 情 意이다. 身은 내용상 情(칠정 또는 사단 등으로 표현하는 감정)이다. 意 知 身은 명덕으로서, '나(我) 자신'의 구체적 모습(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意 知 身의 동사 誠 致 修 / 正은 意 知 身을 어찌하는 행위로서 明明德의 동사 明으로 대치할 수 있는 동사이다. 따라서 [  ]안의 내용은 '나 자신을 어찌함'이며, '어찌함'이란 '밝힘(明)'이다.

誠 致 修 / 正 =明

意 知 身 / 心 = 명덕(나의 마음, 나 자신)

[  ]안은 나 자신을 밝힘을 내용으로 함

아래 그림은 위의 두 그림을 겹쳐 표현한 것이다. [   ]안에 마우스를 올려 놓으면 속그림이 나타난다. [  ]괄호 안의 내용이 '나 자신을 어찌함'임을 나타내려는 그림이다.

대학이 일삼는 대상은 知 情 意로 구분한 나 자신(의 마음)일 뿐이다.

가2. 誠意와 (  )안의 구분

(  )안의 내용은, '나 자신을 어찌함'에 있어 '할 일의 구체'이고,

誠意는, '나 자신을 어찌함'의 '주체'가 되는 조목이다.

知 情 意에서 意는 나 자신의 주체가 되는 마음(일신의 주재자라고 한다)의 명칭이다. 誠意의 주어 역시 意이므로 誠意는 '나 자신-주체'를 誠하게 하는 일이며, 동시에 '나 자신을 어찌함'의 '주체'가 된다.

주체가 되는 意는, 致知+修身/正心으로 구체화된다. 意는 (致知+修身)/正心하려는 意가 되는 것이다. (致知+修身)/正心은 意가 하려는 일의 구체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誠意를 '나 자신을 어찌함의 주체'라고 하는 것이고, (  )을 어찌함의 구체적 대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誠意는 대학을 경영하는, 주재하는 경영자, 주재자인 것이다. 예전의 표현을 빌리면 誠意는 行情者(행정자)이다. '知와 情을 운영하는 조목'이라는 뜻이다.

誠意

 

致知+修身

 

 

正心

 

어찌함의 주체 조목

어찌할 대상 조목들

성의의 구체적 모습

 

가3. (  ) 안의 내용

(  )안은 ⓐ知와 行, ⓑ體와 用( / )의 구분이 있고, 意가 할 일의 구체적 모습이다.

 

가3-1. 知와 行의 구분

대학에서,

致知는 知의 영역이다.

修身은 行의 영역이다.

대학이 다룰 일이 知와 行일 뿐이며, 그 구체적인 일의 명칭이 致知+修身이다. 致知와 修身은 知와 行이라는 기준에 따라 致知와 서로 상대하여 나란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意는 (知와) 行에 배당하여 이들과 상대하여 말하면 안된다.

意의 내용이 바로 致知이거나 修身이거나 아니면 이 둘이므로

意에 이미 致知와 修身은 포함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만약(주자의 설명처럼),

意를 行에 배당하고 意를 行의 시작으로 보면(行之首 행의 시작)

意의 영역에서 知를 제거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意는 行의 시작일 뿐 아니라 知의 시작이기도 하다.

意는 知와 行을 겸(合一합일)할 뿐 아니라 知와 行을 나누기(騈進병진. 나란히 行함)도 한다. 誠意와 (  )의 구분은 바로 지행합일(知行合一), 지행병진(知行騈進)하는 誠意의 모습, 대학의 주재자로서의 誠意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誠意(  )안을 풀면, (성의*치지 + 성의*수신)/정심이 된다. 성의로 말미암아 知와 行을 묶을 수도 있고(合一), 나눌 수도(騈進) 있는 것이다.

 

이러한 誠意의 모습을 천자적이라고 표현한다. 천자는 자신의 방기를 다스리는 면에서는 여느 제후나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제후가 모두 천자에 속하여 있으니, 천자는 사해 내의 주재자가 되는 것이다. 誠意가 바로 대학의 천자적 조목인 것이다.

경의 제4절 6개의 欲자가 바로 意이다. 欲은 의욕으로서 意인 것이다.

古之

옛날

①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천하에서 明德을 밝히고자 하면

먼저 治國하고

②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治國하고자 하면

먼저 齊家하고

③欲齊其家者

先修其身

齊家하고자 하면

먼저 修身하고

④欲修其身者

先正其心

修身하고자 하면

먼저 正心하고

⑤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正心하고자 하면

먼저 誠意하고

⑥欲誠其意者

先致其知致知在格物

誠意하고자 하면

먼저 致知하였나니 致知는 格物에 있다

 저 欲을 誠하게 하는 것이 바로 誠意이다. 천자적인 조목임이 확연하다.

 

가3-2. 體와 用의 구분

正心을 분모가 되게 한 것은 正心이 致知와 修身의 공통분모라는 의미이다. 공통분모의 보통 의미는 밑바탕이 되는 것으로서 서로 다같이 지니고 있는 것이란 의미이다. 正心의 心은, 情과 知의 바탕이 되는 마음으로 쓰이고 있다. 情과 知는 바탕이 되는 마음 心이 출렁한 마음이다(心之用 마음의 물결). 출렁한 물결 역시 물이 듯이, 출렁한 마음 역시 마음이다. 출렁인 마음을 총칭한 표현이 情이고, 이 情 가운데 知 情 意의 구분이 있다. 출렁한 마음 역시 心이지만, 知 情 意(출렁인 마음)라는 구분이 있으면서 또 心이라는 표현이 있을 경우, 그 心은 출렁인 마음의 바탕이 되는 마음이다. 이 心은 그저 心일 뿐이다.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마음, 범연히 말하는 마음의 표현(명칭)으로서 正心의 경우 바탕의 마음으로 구분한다. 마음의 출렁임은 發이라고 표현한다. 이 표현을 쓰면, 情은 心이 發한 것(已發 이발)의 총칭이다. 발하기 전의 마음, 발한 마음의 바탕을 體라고 하고, 발한 마음을 用이라고 한다. 따라서 분모와 분자로 표현한 것은 體와 用을 구분하기 위한 방편이다. 실제 나누면 안된다. 필요상 정심을 1로 삼아 설명하기도 한다.

正心은 體를 바로 하는 공부의 명칭이고,

致知+修身은 用을 바로 하는 공부라는 뜻이다.

 

나. 格物의 의미

대학이 일삼는 대상은 知 情 意로 구분한 나 자신(의 마음)일 뿐이다. 이 마음의 내용을 채워 이 마음을 비로소 요리할 수 있게 하는 조목이 格物이다. 格物함이 없는 경우, 이 마음은 빈 그릇과도 같다. 닦아서 광은 낼 수 있겠으나 요리 불가능한 빈 그릇일 뿐이다. 외물에 감응함으로써(格物) 비로소 요리가 가능하게 된다. 또한

意, 知, 身(情)이라고 한 이상, 반드시 외물에 감응한 마음의 명칭이다(已發한 마음의 명칭이므로). 따라서 '외물에 감응하지 않은 意, 知, 身(情)'은 비오는 달밤처럼 모순이다.

格物이 바로 意, 知, 身(情)으로 구체화된 내 마음의 내용을 채워 어찌할 수 있게 해준다. 생물에 格할 수 있기에 생물학이라는 致知의 행위가 가능하다. 자식이 있기에(그러기에 格할 수 있기에) 나의 마음에는 慈라는 情이 발하고 그것을 다듬을 수가 있다.

格物은, [  ]안의 내용 즉 '나 자신을 어찌함'이 '어떻게 가능하냐'에 대하여,

格物함으로써 가능하다는 답을 준 것이다.

유학이 실학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겠느냐.

格物함으로써만이 [나 자신을 어찌함]이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나1. 格

格은 나 자신(知 情 意)이 物에 접속하는 모든 행위의 총칭이다. 임하는 것, 나아가는 것, 접촉하는 것, 보는 것, 만지는 것, 더부는 것(與) 등 외물과의 연결이 다 格이다.

 

나2. 物

物은 사람이 생각하고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모든 존재이다. 유형 무형의 모든 것이 다 物이다. 존재하는 것은 다 物이다.

物은

'홀로 쓸 때'와

'함께 쓸 때' 내용이 달라진다.

物 한 자 홀로 쓰일 경우 위에서 말한 그대로 모든 것이 다 物에 속한다.

상대하여 쓰일 경우 상대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다. 物我의 경우는 物과 我가 상대한 경우이다. 나 아닌 것이 모두 物에 포함된다. 산천초목 금수 어별, 부자 군신 부부 붕우 형제 등이 모두 物이다.

 

나3. 有物有情(유물유정), 物外無心(물외무심)

見物生心(견물생심)은 有物有情(유물유정. 物이 있으면 情이 있다. 物이 있어야 情이 있다. 物 있는 곳에 情이 있다)의 뜻을 지닌 말이다.

 

天生蒸民 천생증민(하늘이 사람을 내시니)

有物有則 유물유칙(物은 物마다 이치가 있도다)

- 『시경 』 「대아」 '증민 烝民' -

 

有物有則(유물유측). '物이 있는 곳에 법칙이 있다. '유물유측은 格物致知를 설명할 때 등장하는 말이다. 物에, 파악할 이치가 내재하므로, 궁리를 위해서는 반드시 格物해야 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인용구이다. 실제의 사물에 임하여(格) 그 사물에 내재한 이치를 연구하는 것이 格物致知의 뜻이다. 格物로 인하여 致知가 공허한 관념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유물유측이 致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格物致知일 뿐 아니라 格物修身으로서 修身 역시 格物하지 않으면 修할 情의 내용이 없게 된다. 知 情 意 등의 마음은 心이 發한 것이기 때문이다. 有物有則의 則은 情이 발하는 원리도 되는 것이다. 有物有情 또는 無物無情(무물무정. 物이 없으면 情도 없다), 또는 物外無心(물외무심. 물밖에 마음도 없다)이므로 知 情 意로 표현된 '나 자신'을 어찌하려면,  이러한 '나 자신' 나 자신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物에 格하여야 하는 것이다(대학은 物에 格하지 않은 나를 공허한 나,  거짓 나로 보는 셈이다. 참나의 조건에 격물이 있는 것이다).

物外無心은 왕양명의 心外無物(심외무물)에 상대하는 말이다.

원론으로 말하면 심외무물이다. 하지만

실제로 말하면, 物外無心이다.

대학은 원론에 머무는 학문이 아니고 실제의 학문, 즉 실학이므로 物外無心의 학문이다. 物이 없으면 밝힐 마음도 없고, 밝힐 수도 없고, 밝힐 필요도 없게 된다. 物이 있기 때문에 밝혀야 할 필요가 생기고, 또 밝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格物의 의미이다. 주자의 명덕 정의에 '구중리 응만사'라는 말이 있다. 명덕이라는 것은, 인의예지의 性을 갖추고 만사에 응하는 物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만사(萬事)는 物이다. 만사가 없는데 마음이 무슨 쓰임이 될 수 있겠느냐. 物外無心이다.

經에

致知在格物이라고 하였다. 致知만이 在格物이라고 이해하면 안된다. 在格物. 위의 모든 조목이 다 在에 걸려있다. '[     ]格物.' 경문(經文)에 있는 가 바로 저 공식에서 [  ]이다.

 

나4. 物중의 物=사람(民)

物중의 物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감응한 마음이 가장 소중한 마음이며 어

어찌할 최상의 재료이다. 모두 한 마음의 출렁임이지만 금수에 출렁인 마음과 사람에게 출렁인 마음을 저울에 달면 당연 사람에게 출렁인 마음이 무겁다. 사람 살리고자 하는 마음을 밝히는 것과 금수 살리고자 하는 마음 밝히는 것과 경중, 선후, 본말이 명확하다.

 

나5. 사람 중의 사람=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우

사람은,

구체적으로,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우 등의 오륜 속에 있다. 오륜은 家 國 천하 공동체의 삶에 핵심이 되는 사람의 관계이다. 따라서 밝힐 재료 가운데, 이 관계(오륜)에서 발하는 마음, 출렁인 마음 이상의 더 좋은 재료는 없다. 누구나 저 오륜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저 관계 중 결하는 것이 많을수록 밝힐 마음, 밝힐 일도 적어져, 마음 밝히는 일(사람됨)이 보잘 것이 없게 된다.

 

 3. 공식의 적용


 

대학의 저 공식은 f(x)=y의 함수식이다. x에 해당하는 것이 格物의 物이다. 物에 따라 y값이 정해진다.

物중의 物인 '인민(人民)'을 대입하면, y 값은 新民이 된다.

격民[성의(

치지+수신

)]=신민

정심

이 경우 知와 身(情)과 意는 民에 格하여 출렁인 마음이 되며, 이 마음을 밝히면 그 밝힘()은 新民이다. 자연, 新의 목적어는 명덕이 된다. 民은 格物, 즉 格民(격민)의 의미를 품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新의 목적어가 아니다. 이 경우 格의 의미는 '더불다'는 뜻의 與가 알맞다. 新民은 자신여민(自新與民, 민과 더불어 스스로를 새롭게 함)인 것이다.

 

物에 家를 대입하면, y값은 齊家가 된다.

격家[성의(

치지+수신

)]=제가

정심

이 경우 知와 身(情)과 意는, 家라는 영역에서 家라는 物에 출렁인 마음이다. 이 마음을 어찌하는 행위가 곧 齊家가 되는 것이다. 新民의 경우와 같이 齊의 목적어는 자신의 출렁인 마음이며 家는 역시 格家의 의미를 품고 있다.

治國 平天下의 경우도 역시 똑 같다. 民(家 國 천하)의 중요성이 이렇듯 명확하다. 民(家 國 천하)이 없으면 밝힐 필요도 없고 밝힐 마음도 없고 밝힐 수도 없다는 것으로 格物은 유학이 실학(實學)임을 입증하고 있다.

 

 4. 공식에 따른 대학의 정의


 가. 대학은 格物의 학이다

저 공식을 통하여 대학의 이해에 도달하였다면, '대학은 格物의 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  ]안의 내용이 마음을 밝힌다는 것인데 마음을 밝힌다는 것은 대학에서만 쓰는 말이 아니다. 여타 다른 학문에서도 마음을 밝힌다는 말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학문 체계에서 마음을 밝힌다는 것과 대학의 마음 밝힘이 다른 것은 格物이다. 格物은 대학의 특징, 유학의 고유함을 잘 표현한 조목이면서, [  ] 안의 내용(자신을 밝힘)을 實하게 하고, 밝히는 일을 가능하게 해준다. 저 공식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  ]안을 생략하고, '대학은 格物의 학'이라고 하였을 경우 그 의미는 物에 나아가 나의 명덕을 밝힌다는 뜻이 된다. 실제 家를 대입하여 '家에 格한다'라는 표현은 家라는 物에 나아가(家라는 영역에서), 家라는 物에 출렁인 나의 마음을 밝힌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러하듯 格物은 대학을 대표하는 조목, 특징 짓는 조목으로 손색이 없을 뿐아니라 의미 또한 고유하다.

 

나. 대학은 誠意의 학이다

이 표현은 대학의 경영 주체인 誠意의 주재성에 바탕을 둔 표현이다. 예부터 대학을 일러 誠意일 뿐이라고 선대의 학자들이 전하였다.

성의[격물(

치지+수신

)]=명명덕

정심

誠意를 밖으로 끌어 내면 위와 같이 된다. 格物 致知하는 것도 格物 修身하는 것도 다 誠意의 몫이 된다. 誠意가 아니면 위 식에서 [  ]안의 일이 행해지지 않는다. 誠意는 대학을 대표하는 조목(주재자)으로서 誠意를 가지고 대학을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다. 대학은 명덕의 학이다

저 공식의 값을 가지고 표현한 것이다. 대학의 도가 明明德에 있다고 할 경우 物(x값)이 아직 정의되지 않은 상황에서의 y를 가지고 하는 말이므로 아직 실제값이 아닌 원론 표현이다. 따라서 대학의 도가 명명덕에 있다고 하거나 대학은 명명덕의 학이라고 할 경우, 대학을 원론 차원에서 정의한 것이다. 대학을 원론차원에서 정의하면 명명덕의 학이되는 것이다.

 

라. 대학은 新民의 학이다

物이 民일 경우(物=民), 明明德(=y)의 실제값은 新民이 된다. 民은 家 國 천하(의 民으)로 구체화되므로 新民은 齊家 治國 平天下로 세분된다.

 

이상의 몇몇 정의 중 어느 것을 들어도 대학의 전체를 표현하는 말이 된다.

格物과 誠意는 조목을 가지고 한 정의이며,

明明德과 新民은 강령을 가지고 한 정의이다.

모두 다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의 대학이다.

 

이밖에 '대학은 修身의 학이다', '대학은 지어지선의 학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으나 공식을 통해 가능한 것은 아니고, 본문의 뜻에 의거하여 가능하다.

다만,

'修身으로 本을 삼으라'라는 경의 말씀을 저 공식에 따라 이해하고 그런 의미를 가지고 修身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수는 있다.

'修身 - 本'이라고 할 경우, '修身과 상대하고 있는 末은 무엇인가'라고 하였을 적에 저 공식에 따르면 修身의 상대가 되는 것은 致知밖에는 없다(치지+수신). 致知의 知에 대하여 修身은 行으로, 致知와 修身이 상대하고 있다. 따라서 '修身(行)-本', 致知(知)-末'의 구도를 볼 수가 있다.

 

 5. 결론


가. 제거된 오류

가1. 明明德과 新民을 先後에 배당하는 오류의 제거

저 공식과 그 생각에 의거하면 통용되고 있는 대학이 가진 오류가 발생하지 않는다. 팔조목의 서로 다른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저 공식이 부피를 내는 공식이라고 할 경우 明明德은 '부피'이다. 부피라는 것은 개념일 뿐이다. 영원히 부피일 뿐이다. 실제 공간의 부피는 100입방미터 등 숫자로 나타난다. 부피가 따로 있고 실제공간 100입방미터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부피=100입방미터). 100입방(齊家)이든 200입방(治國)이든 300입방(平天下)이든 다 부피(명명덕)이다. 齊家도, 治國도, 平天下도 明明德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오류의 하나인 修身 다음에 齊家라는 생각, 明明德 이후에 新民, 또는 수기치인이라는 생각 등 明明德과 新民을 두 개의 일로 여기는 생각은 거뜬히 폐기할 수가 있다. 明明德이 修己라고 표현한다면 新民도 역시 修己가 된다. 明明德은 修己의 원론(설계), 新民은 修己의 실제(건축물)가 된다.

 

가2. 대학의 주체를 통치자, 엘리트, 지도자에게 국한하는 오류 제거

아버지는 되어야 齊家하고, 적어도 감투라도 써야 治國한다거나 미국의 대통령 정도가 되어야 平天下한다는 생각도 절로 폐기된다. 사람이라면, 家 國 천하의 사람이고(家 國 천하라는 속성을 지녔고), 이 속성을 계발하자는 것이 明明德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家 國 천하라는 物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 新民(제가 치국 평천하)이다. 사람이라면 남녀노소할 것 없이 누구나 이러한 속성에 이러한 마음을 내는 家 國 천하 상황에 있게 되므로 이 마음이 있는 한(살아 있다면) 누구나 齊家 治國 平天下의 주체가 된다. 왕조시대에도 그러하였고 오늘날도 역시 그러하다. 家 國 천하에 감응한 내 마음을 밝히는데 내가 아니면 누가 주체이겠느냐.

 

가3. 誠意를 知와 상대하여 行에 배당하는 오류 제거

誠意를 행에 배당함으로써 誠意의 영역에서 致知 즉 知의 영역을 제거한 오류가 절로 사라진다. 주자는 전6장 집주에서 誠意를 '自修의 首'라고 하였다. 自修는 學과 상대한 말로서 行의 뜻으로 쓴 말이다. 誠意는 行의 首일 뿐 아니라 尾(미)이기도 하며, 知의 首일 뿐 아니라 역시 尾이다. 대학의 영역을 知와 行으로 구분하여 볼 때 誠意는 知와 行을 수미관통하는 조목이다. 대학의 알파 오메가에 해당하는 조목이다.

 

가4. 格物을 致知에 국한하는 오류 제거

格物을 致知에 국한하여 格物致知라고만 붙여 읽고 생각하는 반쪽 생각이 절로 사라진다. 格物致知일 뿐 아니라 格物修身이다. 자연, 格物誠意가 되는 것이다. 格物은 대학을 일관하는 道가 되는 것이다.

 

가5. 개인과 사회를 상대하는 오류 제거

이 오류 역시 明明德 新民을 두 개의 일로 보는 데서 파생한 오류이다. 修身까지의 조목. 즉 明明德을 개인의 수양, 新民을 사회적 실천으로 상대하는 생각은 유학의 본뜻과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생각을 밀고 나가 明明德을 불교의 소승에, 新民을 대승에 비유하는 경우도 보인다.

대학에서 밝히고자 하는 명덕은 知 情 意일 뿐이다. 知 情 意는 출렁인 마음이다. 출렁이지 않은 것은 知 情 意라고 이름하지 않는다. 이 출렁임은 物에 格함으로써 가능하다. 物이란 것은 家 國 천하의 物이다. 따라서 知 情 意를 밝힌다고 할 경우, 家 國 천하의 物을 도외시하게 되면 그 知 情 意는 공허한 것으로 밝힐 것이 없게 된다. 知 情 意가 家 國 천하의 物에 格하여 家 國 천하의 知 情 意가 될 때 비로소 밝힐 수가 있게 된다. 밝힐 수 있는 知 情 意는, 필연적으로, 家 國 천하의 物에 格한 것이므로, 家 國 천하의 知 情 意이다. 이러한 知 情 意가 바로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家 國 천하를 빼놓은 나 자신(知 情 意)은 밝힐 이유도 필요도 방법도 없게 된다. 나 자신(知 情 意), 이 마음은 家 國 천하와 상대하는 무엇이 아니다. 나 자신, 이 마음은 이미 家 國 천하라는 속성을 지니고, 家 國 천하의 物에 출렁한 자신이며 마음이다. 이러한 자신을 어찌하는 것이 곧 齊家 治國 平天下가 되는 것이므로 개인과 사회를 대비하여 명명덕을 개인 수양, 신민을 사회적 실천으로 짜맞추는 생각은 전혀 대학의 생각이 아니다. '사람의 속性은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대학은, '家 國 천하'라고 답하고 있다. 나 자신과 家 國 천하 공동체는 개인과 사회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존재는 家 國 天下라는 속성을 지닌 존재이므로 家 國 天下와 나 자신을 분리하면 안된다.

 

나. 과제

오류를 제거하였으니 설치하여 돌리면 된다. 위에 든 저 오류 때문에 대학은 이제까지 설치조차 되지 않았다.

대학의 진실을 알리고 거기에 얹어 쓸 응용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이 과제로 남는다. 실제 응용프로그램은 이미 대학과 관련 없이 세상에서 돌아가고 있다. 이제 대학과 따로 돌아가던 응용프로그램을 대학에 얹어 家 國 천하의 속성을 가진 身의 계발이 더욱 정밀하고 새롭게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