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명덕

명명덕은 태학의 강령이다.

강령이라는 것이 본시

세세한 것의 상대어이므로 대강일 뿐인데,

명명덕이란 강령은,

신민이라는 명칭과 상대하였을 적에

원론적 차원에서 태학을 총체적으로 선언한 명칭이므로

이것만 가지고 보면 이름만 있는 공허한 구호일뿐이다.

그러므로 명명덕 제목하에서는

명덕이란 무엇인가에 무게를 두고 그것을 理氣論(리기론)과 연결하여 원론적 개론적 차원에서 설명을 하므로 이해가 안되는 것이 있겠다. 모르는 것은 그냥 지나치기 바란다.

 

명덕이란 무엇인가.

물은 명덕과 어떤 사이인가.

이것만 알면 그만이다.

 

여타의 설명은 오히려 이해에 방해가 될 수 있다.

 

 

명명덕은 삼강령 중 한 강령으로서 대학의 내용을 원론 차원에서 총론한 강령이다. 대학을 원론 차원에서 정의하면 명명덕이다. 원론은 실제와 상대한 말이다. 실제에 비하면 구체성이 결여된 표현이다. 명명덕은 원론으로서 대학의 전체이다. 명명덕 외에 대학의 다른 부분은 없다.

 

1. 명덕

具衆理 應萬事者(구중리 응만사자) = 마음

 

명덕.

밝은 덕이라고 번역은 쉬 되지만 밝은 덕이 무엇인지 따지게 되면 분명한 영상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집주의 설명은 이러하다.

 

'명덕이라는 것은 허령불매한 것으롯, 衆理(중리: 여러 이치)를 갖추고(具)서는 만사(萬事)에 감응(應)하는 物이다(虛靈不昧 具衆理而應萬事者 허령불매 구중리이응만사자).'

 

이것도 번역은 쉽다. 그래서 통과. 그러나

그것이 무엇일까 하고 또 자문하면 명덕이라고 할 밖에 분명한 영상이 역시 머리에 그려지지 않는다.

이 설명에 '心'이라는 말을 추가하여,

 

'명덕은 마음이니, 허령불매한 것으로서,.......'

 

라고 하였다면 '명덕은 마음이고 마음은 이런 것이구나'라고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음(의 능력, 기능)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할 다른 무엇이 없다. 주자의 설명에 따라 명덕을 이해해 본다. 虛靈不昧(허령불매)는 제외하고 그 이후의 정의만을 살펴지자.

 

명덕은 마음이다. 집주의 저 설명은 마음을 설명한 것이다.

마음을 본體와 작用으로 구분하여,

具衆理(구중리)를 體에,

應萬事(응만사)를 用에 배당하고, 여기에 마음을 이해하는 도움이 되는 여러 용어를 층층이 연결해 보자.  

 

 

집주의

명덕 정의

衆理

중리

萬事

만사

1층

그릇(器)

내용(實)

감응자

감응대상

2층

 

 

3층

 

격물의 物

4층

(정심의 心)

(수신의 身 마음)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우(民)

5층

미발

이발

 

6층

리승

기발

 

7층

 

1.1. 도표의 설명

 

- 體 칸 1층 : 갖추고 있는 것은 그릇 器이며, 중리는 담겨진 내용이다  

집주의

명덕 정의

衆理

중리

1층

그릇(器)

내용(實)

무엇을 갖추고 있으려면 틀, 그릇이 있어야 한다. 그릇이 있어야 여기에 무엇을 담아 지니고 있을 수 있다. 具는 器 그릇 이다. 衆理는 이 器에 담기는 내용이다. 이 내용이란 實(찬 것, 참: 滿)이며 우리말로는 '알맹이'의 '알'이 적당할 것 같다. 여러 理(衆理)는 인의예지(仁義禮知)이다.

 

- 體칸 2층 : 器는 心이며, 내용은 性이다  

집주의

명덕 정의

衆理

중리

1층

그릇(器)

내용(實)

2층

그릇을 心이라 하고 내용을 性이라고도 한다. 이 心은 心의 여러 용법 가운에 性과 상대하여 쓰이는 心이다.

 

- 體칸 3층 : 心은 氣이며 性은 理이다

집주의

명덕 정의

衆理

중리

1층

그릇(器)

내용(實)

2층

3층

 

理氣로 말할 경우, 心 性을 대비하는 경우의 心은 氣이고, 性은 理이다. 이 대비의 정착된 용어가 心卽氣(심즉기)와 性卽理(성즉리)이다. 2층과 3층을 종합한 표현이다. 이는 心을 性과 대비한 용법에 해당한다.

 

- 體用 4층 : 구중리는 정심의 心이며, 응만사한 것은 情으로서 수신의 身이다

집주의

명덕 정의

衆理

중리

萬事

만사

1층

그릇(器)

내용(實)

감응자

감응대상

2층

 

 

3층

 

격물의 物

4층

(정심의 心)

(수신의 身 마음)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우(民)

 

4층의 心은 心卽氣와 性卽理를 포함한 개념이다. 氣로서의 心에 理가 性으로서 담겨 있는, 들어가 있는 개념으로서 이 心은 心의 본체를 가리키며,  正心의 心이 그것이다.

이러한 心의 본體가 외물인 萬事(여러 物)에 감응 한 것은 心의 작用으로서 情이라고 부르며, 수신의 身이 그것이다. 이는 心을 그것의 用인 情과 대비하는 心의 용법이다.

 

- 體用 5층 : 구중리는 未發(미발)이며 應萬事사는 已發이다

5층

미발

이발

 

 

하나 마나한 말이다. 여기서 發의 쓰임이나 파악하면 된다.

마음이 아직 발동하지 않은 상태를 未發(미발: 아직 발하지 않음)이라 하고, 발동한 상황을 已發(이발: 이미 발함)이라고 한다.

 

- 體用 6층 : 구중리는 理乘이며, 응만사는 氣發이다

6층

리승

기발

 

7층

 

氣發理乘(기발리승)을 적용한 것이다. 體칸 具衆理는 理가 氣에 올라타고 있는 모습이다. 理乘(리승)이 그것이다. 用칸의 應萬事는 '理가 올라타(乘) 있는 氣'가 출發, 발動한 모습이다. 사람이 말에 올라타 있다가(구중리) 출발(응만사) 한 그림이다.

 

- 體用 7층 : 구중리는 體이며 응만사는 用이다

6층

리승

기발

 

7층

 

이상을 종합하면 體칸은 마음의 본體를 설명한 것이고, 用칸은 마음의 작用을 설명한 것이다.

 

- 用칸 :

萬事

만사

감응자

감응대상

 

 

 

격물의 物

(수신의 身 마음)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우(民)

이발

 

기발

 

 

만사(萬事)는 格物의 物 :

이 物이 없으면 이 마음도 없다(物外無情, 또는 物外無心). 그러므로 心外無物(심외무물) 사상은 공허한 논리이다. 無物無心(무물무심: 物 없이 마음 없음)이다. 그러므로 마음이라고 하면 반드시 物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명덕 역시 마음이므로 物 없이는, 없는 物이다.

無物無情(무물무정), 物 없이 情(마음) 없다. 物外 無心이다. 이런 사상이 格物이다. 知에만 格物이 해당하은 것은 아니다. 格物致知일 뿐아니라, 格物修身이기도 하다. 格物은 知와 行을 관통하는 대학의 道이다. 致知 뿐 아니라 修身도 格物修身이다. 이러한 格物은 실제 강령과 조목(新民/ 齊家治國平天下)에서 民과 家 國 天下로 나타난다.

 

物을 밝히는 것과 物에 감응한 마음을 밝히는 것:

物이라는 것은 나(我)와 상대하는 物로서 재외자(在外者), 在人者(재인자)이다. 이러한 物은 내가 밝힐 수도 있고 밝히지 못할 수도 있다. 또 밝혔다고 하여 꼭 득이 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物에는 命이라는 게 있어 만사가 뜻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니고, 설령 뜻대로 이루어졌다고 하여도 그것으로 나나 物이 꼭 새로워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돈 없으면 아무 문제 없을 인생이 돈 생겨서 파탄 나기도 하지 않는가. 외물의 이러한 사정에서 外物을 밝힌다고 총력을 기울이다 보면 공동체에 파탄이 오게 되어 있다. 외물은 한정되어 있고 또 命이 있고, 구하는 마음은 많고,.... 이 때문에 다툼이 끝 없이 이어지게 된다(얻었다고 이로운 것도 아닌데). 이것이 外物을 밝히는 폐해이다.

명덕을 밝힌다고 하는 것은 外物을 내면화하여 밝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命에 관계 없기에,  밝히면 밝힌 만큼 밝아지고, 밝아지면 꼭 득이 된다. 이것이 外物을 밝히는 것과 외물에 대하여 발하는 마음 명덕을 밝히는 것과의 차이이다.

 

1.2. 心과 명덕의 구분

- 구분 1 :

①명덕은 心에 포함되는 관계

명덕은 心이다. 그러나 '心이 명덕이다'라고 하면 안된다. 心은 마음을 나타내는 명칭 가운데 가장 범위가 넓은 용어라서 명덕이 품고 있는 것보다는 의미와 활용 범위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명덕과 心은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명덕

 

 

 

 

 

②명덕은 性을 포함하여서만 쓴다

心과 性은 서로 대비하여 말할 수 있다. 心卽氣와 性卽理가 그것이다(위의 體칸 3층 설명 참고). 心은 氣이고, 性은 理이다. 그러나 명덕은 性과 대비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명덕은 性 자체의 뜻도 있고 항상 性을 포함하여 말하기 때문이다(남당의 명덕설 참조). 똑같은 원리를 역으로 적용하면 心(명덕과 대비하고 있는 心) 역시 氣와 상대하여 쓸 수 없는 운명이다. 왜냐 하면 이 心이 氣이기 때문이다.

 

- 구분 2 : 심은 제 각각, 명덕은 누구나 동일

心을 말하면, 성인과 중인의 心이 다르고, 사람 사람의 마음이 다 다르다. 명덕으로 말하면 성인과 중인의 마음이 다 같고 사람사람의 마음이 다 같다. 성인의 마음은 전체적으로 명덕이라서 心이 곧 명덕이 되는 것이고, 중인의 경우는 그러하지 못하다. 명덕은 마음의 明處, 마음 본연의 속성을 가리킨 명칭이기 때문에, 그속성으로 말하면 성인이나 범인(보통사람)이나 같다. 성인의 마음은 그 氣가 청명순수하고 중인의 마음은 탁하고 얼룩져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心氣를 전체적으로 적용하면 성인과 범인이 같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범인의 마음에도 부분적으로 정도 차이는 있지만 청명순수함이 있다. 성인이나 범인이나 이것은 동일한다.

비유하자면, 心은 鑛石(광석)과 같고 明德은 광석 안에 포함된 金과 같다. 금광에서 금을 캔다는 말은 대부분의 경우 금이 박힌 광석을 캔다는 말이다. 캔 광석을 빻거나 하여 돌에서 금을 분리한다. 그런데, 분리과정을 거칠 것도 없이 땅속에서 캐면 바로 금인 경우도 있다고 한다. 「광석=금」인 경우는 心이 바로 明德인 경우이다. 광석으로 말하면 금을 함유하고 있는 정도가 광맥에 따라 각기 다르나, 금으로 말하면, 타산이 잘 안 맞는 광맥의 금이나, 돈을 잘 벌어주는 광맥의 금이나 다 같은 금이다. 心으로 말하면 衆人(보통사람)과 聖人의 心이 다르지만 明德으로 말하면 聖人의 心(明德)이나 衆人의 心(明德)이나 다 같다.

 

1.3. 마음의 명칭들

萬事

만사

감응자

감응대상

 

 

(격물의)物

 

이 표는 맨 처음의 표에서 用칸의 일부를 떼어 낸 것이다. 應 없는 心은 心이 아니다. 應은 반드시 物(만사)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物外無心이라고 말한다. 대부분 이것을 간과하고 心外無物만을 외친다. 無物無心, 더 정확히 표현하면 無物無情, 또는 物外無心이다. '만사'라고 하였듯이 物은 만물이므로 감응하는 곳에 따라 이름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한데 실제로 그러하다. 마음은 감응하는 物, 즉 감응처가 어디냐에 따라 이름을 달리한다.

부모를 감응처로 하여 감응한 마음을 孝라고 한다.

자식을 감응처로 하여 발한 명덕을 慈라고 한다.

형제에게 대하여 발하는 마음을 弟라고 한다.

임금에게 대하여 발하는 마음을 忠이라고 한다.

신하에 대하여 발하는 마음을 恕라고 한다.

남녀에 하여 발하는 마음을 色이라고 한다.

이런 마음들은 모두 善한 마음들이다. 善하다는 것은 원론차원에서 하는 말이다. 실제에 있어서는 탈을 지니고 있다. 이 때문에 밝혀야 하는 공이 들게 된다. 또 物에는 本末이 있으므로(物有本末물유본말), 본말에 따른 이름도 있다. 순임금이 말씀하신 인심도심이 그것이다. 物의 本에 감응한 마음을 도심이라고 한다. 物의 末에 감응한 마음을 인심이라고 한다. 모든 마음은 실제에 있어서 인심이 아니면 도심이 되는 셈이다.

이처럼 감응처를 기준으로 하여 마음의 이름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마음의 속성에 따라 이름이 달라지기도 한다. 명덕은 마음 본연의 속성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明에는, 밝다는 뜻 외에 大의 뜻도 있다. 전1장의 峻德(준덕)은 大德이라는 뜻이다. 명덕이 대덕이라는 뜻으로 峻德을 인용하였는데, 명덕 그 차제의 용어만으로도 대덕의 뜻을 품고 있다. 名山大川(명산대천)의 名이나 明德의 明이나 그 소리는 ‘마루’ ‘메’ ‘미’ 계통으로 大의 뜻이다. 名山의 사전적 설명은 산이 큰데서 유명해지므로 名에서 大의 뜻을 찾고 있지만, 名의 소리에 大의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다. 실제로 明의 사전적 설명에도 大의 뜻이 있다. 명덕 역시 준덕으로서 대덕이다.

마음이 본래 위대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반영한 말이다. 忠 恕 道心 意 등 속성을 나타내는 마음의 명칭들은 모두 善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善心이다. 명덕도 善心이다. '다만 心'이라고 하면 善하지 못한 마음까지 포함한다. 명덕은 善心이다. 善하다는 것은 원론적으로 善하다는 말로서 완전무결하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에 있어서는 결점이 있다.

 

다음 표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분류기준

心의 명칭

비고

파동(波動)

情(마음결)

마음(결)의 총칭 汎稱

마음은 파동

파형(波形)

七情

(희노애락애오욕)

빛의 일곱 색과 같음

원리

(所以發者)

四端

  측은-인

  수오-의

  사양-예

  시비-지

마음을 發하게 하는 원인자인 仁義禮知와 짝을 맞춤으로써

-心의 善함을 잘 보게 하였고

-仁義禮知라는 性을 인식하는 단서로 삼을 수 있게 하였다.

감응처

親(부모), 孝(부모)

慈(자식)

弟(형제 붕우 장유)

仁(부모외의 사람)

敬(어른)

色(남여)

愛(人物의 物)

道心(物의 本)

人心(物의 末)

-어디에 감응하였느냐에 따라

이 색 칸의 마음은 善 일변의 마음, 즉 선심들

속성

明德(光明성)

忠 信(진실성)

恕(向物성)

峻德(위대성)

意 志(주재성)

-마음 본연의 속성

率性여부

道心(率性)

率性之謂道

非道心(逆性)

 

2. 理와 氣

명덕과 心을 구분하는데 쓰인 심즉기 성즉리 매우 헛갈린다. 모르는 말이지만 性卽理는 많이 들어 보았고, 또 왕양명의 심즉리도 들었는데 심즉기라고 하니 매우 헛갈린다. 理氣 이해는 대학 즉 유학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필수라고 해야 할 것 같다.

 

2.1.理 氣는 존재의 근원

는 초 초 아주 처음인 태초, 極 極 아주 極인 太極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것은 저것에서, 저것은 또 저것에서, 이런 식으로 미루어 가면 더 갈 수 없는 그것이 태초이고  태극이다. 이 때, 사실상 때라는 말도 성립이 안 되는 때인데 이 때에 있는 무엇이 바로 理이다. 그것이 無이면 無가 理이고, 그것이 空이면 空이 理이다(여기까지는 아직 사람에게 적용하기 전 순수 지적 추구).  또 그것이 善이면 善이 理이고, 그것이 眞이면 眞이 理이고, 그것이 美이면 美가 理이고, 그것이 誠이면 誠이 理이다(사람에게 적용하는 단계). 그것이 무엇이든 동그라미 하나가 이 모습을 잘 표현하므로 동그라미로 이 모습을 표현해 왔다.

理는 존재의 근거이다. 존재의 원리, 所以然이다. 존재는 그것으로 인하여 존재한다. 따라서 理는 진실로 없는 것은 아니다. 理는 道이며 善이며 性이며(一陰一陽之謂道 繼善者善 成之者性. 주역 계사 상), 인의예지 등 존재의 당위의 법칙이 된다. 無가 아니라 본디 實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實理이다.

이 無(하나의 동그라미)에 꿈틀대는 무엇이 채워지면 이것을 氣라 한다. 이 氣는 공간을 채우고 있는 물질의 뿌리이다. 물질의 골수이다. 無에서 氣까지의 시간은 있는 것이 아니다. 氣 이전의 시간은 역시 無로서 존재하니까. 감각의 시간, 운동으로 나타내는 시간, 길이로 나타내는 시간은 없는 것이다. 존재의 근원을 理에만 두면 一원론이라고 하고 理와 氣에 나누어두면 二원론이라고 하는가 보다.

 

2.2. 理와 氣의 그림 그리기

남당의 정리를 줄기로 理와 氣의 그림을 그려 본다.

 

 - 운동과 형체

理는 운동이 없다. 형체도 없다. 그러니 理는 당연히 일상의 표현으로 無라고 하는 것이다.

반면, 氣는 운동 발동한다. 형체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형체가 있다 없다고 하는 것은 일상 맨눈으로 보는 것을 가정하고 하는 말이다. 모든 형체는 氣에 연관된다. 고형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고형물 운운하는 것도 역시 오감을 기준으로 하는 말이다.

 

-氣質

氣와 質을 구분하여 쓸 경우, 質은 氣의 고형물을 말하고, 氣는 고형물의 뿌리를 말한다. 막걸리로 비유하면 質은 가라앉거나 뜨는 알갱이들이고 氣는 술의 정수 알코올 부분을 포함하는 맑은 부분이다. 중성미자라고 하는, 알갱이 일백억 개가 우리 몸을 관통해도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한다는, 작다는 말로는 상상이 안가는 알갱이도 있다고 하니, 물리학이 더 발전하면 이보다 더 작은 알갱이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 작은 알갱이들이 氣라고 하는 것일까. 氣와 質의 경계는 수치화하여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못될 것으로 보인다. 뜨겁고 차고 한 것이 다 氣인데 이러한 氣는 氣와 質을 대비할 때의 氣이고, 氣 홀로 쓰거나 理와 상대할 경우 氣는 물질의 極이다.

 

- 理氣와 善 不善

氣는 善할 수도 있고 不善할 수도 있다. 理는 純善(순선)無垢(무구)이다. 세상에는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다. 나쁜 일이 가능한 이유는 氣에서 찾는다. 善不善을 말하는 단계는 氣質이 개입한 상태이다. 氣는 운동, 형체 이런 것 때문에 善不善이라는 느낌을 사람이 느끼게 된다(이러한 善不善은 다 사람의 말, 사람의 느낌, 사람의 생각이다. 사람을 떠나서 善不善을 말할 수가 없다). 善과 不善이 다 氣質이 개입된 상태에서 느끼는 감정이지만, 理는 상식의 말로 없는 것인데 거기에 不善의 소지를 가할 수 없다. 이 때문에 不善의 뿌리를 氣에다 두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느끼는 善의 근거는 理에서 찾아야 하고 찾으면 된다. 理가 곧 善이기 때문이다. 理를 無로 설명하는 것은 상식의 차원이고 실제로 理는 無가 아니다. 眞 善 美 性 이런 것이 다 理이다. 善不善을 말하는 도덕 차원에서 理는 곧 善이다. 善할 수도 있고 不善할 수도 있는 氣에 善의 근거를 두면 善의 기준이 없어진다. 善의 안정성을 찾을 수가 없겠다. 理는 형체도 없고 꿈틀거림도 없고 때가 낄 무엇도 없다. 理는 純善이다. 이리하여 理를 善(사람의 말로서 사람이 느끼고 사람이 생각하는 善)의 뿌리로 삼게 된다.

 

- 理氣와 發動

氣는 발동(운동)하는 物이다. 이에 대하여 理는 氣가 발동하도록 하는 원인자 노릇을 하는 物이다. 이것을 일러 所發者(소발자. 발동하는 物), 所以發者(소이발자. 발동의 원인자)라고 표현한다. 氣가 없으면 발할 것이 없고 理가 없으면 발할 수 없다.

 

 -不離不雜

理와 氣의 관계는 우리말 「하나이면서도 둘이고 둘이면서도 하나」라는 말의 뜻을 가진 관계이다. 「하나이면서도 둘이고 둘이면서도 하나」라는 말은 과학의 말이기보다는 알쏭달쏭함을 나타내는 수수께끼 같은 말이다. 이런 알쏭달쏭한 말에 대하여 不離와 不雜이라는 표현은 理氣의 관계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理와 氣는 不離(불리. 떨어질 수 없음), 不雜(불잡. 섞일 수 없음)의 관계에 있다. 하나라는 말은 不離를 말하며, 둘이라는 것은 不雜을 말한다. 不離는 分離(분리)할 物이 아니라는 뜻이다. 不雜은, 그래도 한 덩어리는 아니고 구분은 간다는 뜻이다. 理의 경계와 氣의 경계가 보인다는 말이다. 不離 不雜은 理와 氣를 두 개의 무엇으로 이해하는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말이다. 理氣를 생각할 때 한시도 잊어서는 안되는 말이다.

 

 

-氣發理乘

氣發理乘(기발리승)설은, 不離 不雜의 실제, 理와 氣의 관계 작용을 설명하는 매우 분명한 한 장의 그림이다. 發은 出發 發動 發表 등 움직여서 되는 모든 것이다. 직역하면, 「氣가 發할 때 理가 타있다」는 정도의 뜻이다. 탄다는 말이 들어 있어 어리둥절한 때도 있었는데 알고 보니 매우 친절한 설명이다. 氣는 所發者(발하는 物)로서, 理는 所以發者(발하게 하는 원인자)로서, 不離 不雜의 관계에 있는 모습이 「理가 氣에 올라타고 있는 모습」이다. 사람이 말을 타고 있는 모습, 사람의 지시에 따라 말이 움직이는 모습을 그리면 된다. 움직이는 것(所發者)은 말이며, 움직이게 하는 것(所以發者)은 사람이니 각기 氣와 理를 가리키는 비유이다. 말이 사람의 지시를 잘 따르면 善한 길로 가고, 사람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으면 不善한 길로 갈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하면 안된다. 氣가 理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心이 心의 원리인 理性을 따르는 것이다. 心이 性(仁義禮智인의예지)의 원리를 제대로 따르면 善心이 되고, 거스르면 不善한 마음이 된다. 그러니까 善心이든 不善한 마음이든 모두 不離 不雜의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互發(호발)은 氣發理乘과 다른 길을 가는 설이다. 互發은 理와 氣가 서로 發한다는 뜻이 있다. 理가 發하는 경우도 있고 氣가 발하는 경우도 있다. 氣가 發하면 七情이 되고, 理가 發하면 四端이 되고...... 不離 不雜, 氣發理乘, 발동의 문제를 이해하였다면, 互發설이 어떤 문제를 앉고 있는지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互發은 不離 不雜을 거스르는 잘못이 있다. 理氣는 결코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理를 發하는 物로 취급하는 잘못이 있다. 無氣, 또는 非氣인데 어찌 부르릉 발동하겠습니까.

七情과 四端을 다른 마음으로 취급하는 잘못이 있다. 四端과 七情은 하나의 情이다. 七情을 不善에, 四端을 純善에 배당하는 것은 옳지 않는다. 互發설은 뒤에 수정이 가해지기는 하지만 역시 互發의 오류를 극복하지 못하고 말았는다. 互發의 설을 따르면 남자는 아버지가 낳고 여자는 엄마가 낳고, 또는 잘난 놈(四端)은 아버지가 낳고 못난 놈(七情)은 엄마가 낳고 이런 식이 되어야 한다. 아들이나 딸이나 잘난 자식이나 못난 자식이나 아버지가 엄마를 올라타고 함께 만드는 것이다. 氣發理乘이 바로 이런 사정을 표한 설이다. 이는 비유(parable)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화(allegory)가 아니다. 형이하의 것으로 형이상의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며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딱 하나이다. [발하는 것은 氣이고, 발하게 하는 것은 理이다.] 사람이 내려서 말을 잡아 끌고 갈 수도 있는 것(理發)이 아니냐는 식으로 우화적으로 생각하시면 비유의 뜻을 저 버리게 된다. [理氣의 不離不雜]과 [發之者 氣, 所以發者 理]를 이해하면 그만 이다. 어떤 이는 氣發理乘을 상하구조로, 互發(수정한 설)을 전후구조로 구분하는데 상하전후의 문제가 아니라 氣發一途냐 互發냐 이것이 문제이다.

 

3. 性德과 心德

집주는 德을 得으로 설명한다. 주재자 天의 命이 性이므로 부여한 원천을 소급하여 말하면 性은 命으로서 性命이 되는 것이고, 받은 사람을 기준으로 말하면 性은 德이다. 性德이 그 표현이다. 이것이 명덕을 性과 대비하여 말할 수 없는 까닭이다. 性은 命이며 德이다. 德은 理인 것이다. 그런데 명덕은 理로서의 용법이 아니라 마음의 뜻이다. 理(德)가 마음으로 쓰이는 원리를 새롭게 설명해 본다. 心은, 심즉기의 발동에 초점을 맞춘 마음의 표현이고, 明德은 성즉리의 소이연자(마음의 법), 주재 理에 초점을 맞춘 마음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을 일신의 주재로 표현한다. 이 주재자 心이 법으로 삼을 것은 당연히 이 마음의 원리인 性德이다. 주재자 心에 이러한 당위를 포함시키면 주재자 心은 외연이 줄어 들어 마음 본연의 선한 모습에 초점이 잘 맞게 된다. 이것이 性德에 대하여 心德으로서 명덕이란 말이 생긴 까닭으로 설명해 본다.

전1장 명명덕 해석 장에,

극명덕(克明德: 덕을 잘 밝히셨으니) 다음에

고시천지명명(顧是天之明命: 저 하늘의 밝은 명령을 항상 살핀다), 그 다음에

극명준덕(克明峻德: 큰덕을 잘 밝힘)이 나온다.

 

天之明命(천지명명)은 명덕의 소이연으로서 명덕의 법이다.

명덕을 잘 밝히는 데(克明德)에는   顧是天之明命(고시천지 명명)이 필수이다. 이렇게 하면 극명준덕(克明峻德) 즉 대덕을 잘 밝히게 되는 것이다. 마음으로서의 '德+마음의 法(明命)=준덕(명덕)'의 도식이 性德이 心德으로서 명덕이 된 까닭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한 가지 비유를 든다. 천명의 무엇이 性인데, 다만 命이 아니라 임명장이라는 게 있다고 하면 이 임명장이 명덕이다. 임명장은 다만 쪽지가 아니다. 命을 포함한다. 하늘이 칼에다 命을 새겨 내렸고, 그것을 받았다면(德) 그 칼이 명덕이다. 그 칼 역시 다만 광석, 다만 철이 아니라 순금이다.

 

 

 

 

이념강령

지어지선

실천강령

원론

실제

명명덕

신민

실천조목

격물치지

정심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성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