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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家 治國 平天下 ---- 실제부의 조목들
家와 國과 天下는 物이며, 齊와 治와 平은 事이다. 이 物과 事는 格物의 物이다. 格物의 物이 齊家 治國 平天下의 物이라면, 致知의 知도 역시 齊家 治國 平天下의 知이다. 齊家 治國 平天下의 知라 함은 그 知가 齊家 治國 平天下에 대한 知이며, 齊家 治國 平天下를 위한 知이며, 齊家 治國 平天下의 필요에 따른 知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齊家 治國 平天下는 格物 致知의 대상이면서 格物 致知는 齊家 治國 平天下의 知의 영역이 된다. 格物 致知는 齊家 治國 平天下를 포함하기도 하고 齊家 治國 平天下의 知의 가닥이기도 하다.
格物 致知를 知로, 齊家 治國 平天下를 行으로 분류하여 格物致知를 齊家 治國 平天下의 전 단계로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齊家 治國 平天下를 위하여서는 많은 지식이 필요하다. 家와 國과 天下를 떠나서 格物 致知가 있을 수 없다. 格物致知는 齊家 治國 平天下의 한 부분, 즉 知의 영역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天下 國 家라고 하는데, 天下의 本은 國에 있고, 國의 本은 家에 있고, 家의 本은 身에 있다. - 『맹자』「이루」 상 제5장 - 맹자의 이 말씀을 듣고는 身-本, 天下-末과 같은 식의 구도를 떠올리기 쉽다. 그런 구도는 오류를 일으킨다. 나무에는 지상부 가지와 지하부 뿌리가 있다. 天下니 國이니 家니 하는 것은 각기 한 그루의 나무이고 身은 그 나무의 뿌리이다. 여기에 동사 齊 治 平을 붙여서 齊家 治國 平天下라고 하면 그것 齊家 治國 平天下가 또한 나무가 되고, 修身은 뿌리가 된다. 나무라고 하면 반드시 뿌리를 포함하여 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齊家 治國 平天下는 반드시 修身을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修身과 상대하면 안된다. 身과 분리된 家 國 天下, 齊家 治國 平天下는 태학의 道가 아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本은 末과 상대한 本이 아것이다. 중요성이나 내용 알맹이를 말하는 비유이다. 본은 무엇이고 말은 무엇이라는 식의 분석은 옳지 않다. 단지 家 國 天下에서 身의 중요성을 알아 들으면 된다. 또한, 身→家→國→天下처럼 화살표 구도로 생각하여 순서적인 말씀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修身→齊家→治國→平天下식으로 적용하고 나서, 이러한 화살표를 단계나 과정이나 시간적 전후 관계로 이해하는 습관이 있는데 그러면 안된다. 身→家→國→天下와 같은 식의 시간적 순서는 실제에서는 존재하지 않다. 이러한 것은 머리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자身 이전에 家 國 天下가 존재하고 그것들을 그릇으로 하여 身은 그 그릇 안에 떨어지게 되어 있으므로 실제에서는 天下→國→家→身이라는 방식만 있다. 그러므로 家 國 天下는 身 이전에 존재하면서 身을 규정하는 身의 속성들이 된다. 身에서 家 國 天下의 속성을 빼고 나면 이미 身이 아것이다. 이러한 身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설령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修身의 身이 아것이다. 家 國 天下의 알맹이가 身이듯이 齊家 治國 平天下의 알맹이 내용도 역시 修身이다. 家 國 天下 떠나서 身이 없듯이, 齊家 治國 平天下를 떠나서 修身은 존재하지 않는다. 身은 체육, 의학적으로 수술을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면 언제나 마음 心의 뜻이다. 자신을 돌아본다, 자신을 반성한다, 자신을 일깨운다고 할 경우 자身은 뼈를 기둥으로 한 살덩이가 아니듯이 修身의 身도 그러하다. 마음이다. 이 경우 마음은 신체와 대립하는 마음, 상대하는 마음이 아것이다. 신체를 다 포함한다. 마음을 당기면 신체는 따라오지만, 신체를 당긴다고 마음이 꼭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마음 없는 신체는 시체이다. 신체 없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귀신이다. 修의 목적어는 시체가 될 수 없고, 귀신도 될 수 없다. 家 國 天下의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마음이다. 집을 떠나 다것이다가 문제가 생겨서 경찰서에 들어가 있는 처지가 되거나, 병원 응급실에 누워 있는 처지가 되거나 할 경우, 보호자가 있어야 내보내주고, 보호자가 있어야 수술을 한다. 외국에 나가 있다가, 어떤 문제로, 예를 들면, 인질이 되었다든가 상대국의 중대한 법을 어겨 억류되어 있다든가 하는 등의 일이 생기면 나 하나를 두고 나라간의 문제(외교문제)가 벌어진다. 국제문제가 되는 것이다. 군사 행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 지위로 보나, 재력으로 보나, 德으로 보나 보잘것없는 身이지만, 누구의 身이든 상관없이 그 身이 제대로 된 身이라면 필연적으로 家의 身이며 國의 身이며 天下의 身이다. 골짜기에 처박혀 죽어도 시체를 거둘 가족이란 것이 없고(불행히 외톨이가 된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타국에 가서 인질로 잡혀 사지에 처해도 구해줄 나라가 없는 그런 身, 家 國 天下와 분리된 그런 身이라면 이는 사람의 身, 修身의 身이 아것이다. 이런 身은 닦을 것도 없다. 修身, 身을 닦는다는 것은 家의 身을 닦는 것이며, 國의 身을 닦는 것이며, 天下身을 닦는 것이다. 家의 身을 닦는다 함은 家를 身으로 삼아 나의 마음을 닦는 것이며, 國의 身을 닦는다 함은 國을 身으로 삼아 나의 마음을 닦는 것이며, 天下身을 닦는다 함은 天下를 身으로 삼아 나의 마음을 닦는 것이다. 요약하면 齊家 治國 平天下인 것이다.
修身은 마음에 발하는 情을 過不及이 없게 하는 공부이다(情無不中정무불중). 그러므로 修身이 가능하려면 반드시 情이 있어야 한다. 나의 마음에 인 물결로서의 情은 家 國 天下라는 物에 감응하여 발한다. 따라서 家 國 天下라는 物이 없이는 情이 없다고 할 것이다. 天生蒸民 천생증민(하늘이 사람을 내시니) 有物有則 유물유칙(物은 物마다 이치가 있도다) - 『시경 』 「대아」 '증민 烝民' - [格物致知]에서 나왔던 인용문이다. '有物有則'을 직역하면 '物이 있으면 법칙이 있다'이다. 따라서 物에 格하면 그 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格物致知이다. 이것은 修身이라는 대학의 行에도 역시 통하는 원리이다. 有物有情. '物이 있으면 情이 있다.' '그 物에 그 이치'는 格物致知의 표어이고, '그 物에 그 情은' 修身의 표어가 되어 格物은 知와 行에 통하는 것이다. 物 가운데 物은 사람이다. 사람은 오륜으로 구체화된다. 오륜관계의 사람은 가국천하의 사람이다. 父子 君臣 夫婦 長幼 朋友 이 다섯 관계의 사람은 家 國 天下에 없어서는 안 될 최소한의 사람들, 아니 전체의 사람들이다. 나 역시 이 오륜 관계 중에 있는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 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발하는 情이 修의 목적어인 身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륜 없이 情 없고 情 없이 修身도 없게 되는 것이다. 유물유칙이듯이 有物有情으로서 格物은 대학을 관통하는 사상이며 유학의 확실하고 고유한 사상이다. 格物의 실제 모습은 대학의 실제, 明明德의 실제인 新民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新民의 民이 오륜의 民으로서 民에 담긴 格物의 뜻은 與民(여민: 오륜의 民과 더불어)이다. 新民은 齊家 治國 平天下로 구체화된다. 民을 家 國 天下로 변형하면 新民은 齊家 治國 平天下가 된다. 이 때의 家 國 天下는 於家國天下(가국천하에서)이다. 於가 뜻하는 바는 以, 因 등 修身의 가능한 근거, 修身의 格物사상이 나타날 수 있는 모든 전치사이다. 致知가 格物致知이듯이 修身은 格物修身인 것이다.
인용문 하나를 살핀다.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든 복을 빌고 바라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현대 동서 각 종교에서 보이는 무의미하고 몰가치적인 기복화의 경향은 윤리도덕성의 회복에 커다란 장애적 요소로 자리 잡고 있음은 가히 인류의 미래를 생각할 때 중대한 사안이다. 《삼국유사》 〈신라사원〉편에 사원(寺院)을 정의한 것이 있다. “불법을 믿어서 복을 닦고 죄를 없애는 곳(佛法崇信修福滅罪之處)”이 사찰이라는 내용이다. 이는 부처님 진리를 잘 받들고 믿음으로써, 수복하여 죄업을 소멸시키는 것이 바로 절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수복(修福)과 불법이라는 두 단어이다. 즉 부처님 진리란 무엇이며 과연 수복이란 기복(祈福)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 유가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서 수신(修身)은 단순히 몸만 닦으면 가정과 나라와 천하를 다스린다는 뜻이 아니라, 수신이란 말의 의미 속에 수심신(修心身)이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인데, 마음과 몸을 잘 닦아야 가정이 화목하고, 가정이 화목하여야 나라가 안정되고, 나라가 안정되어야 천하를 안정시킬 수 있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家 國 天下야 말로 수복처이다. 家 國 天下 없이 修身은 불가능하다. 家 國 天下가 있어 修身할 수 있는 것이 복이다. 따라서 家 國 天下야 말로 진정한 수복처이며, 齊家 治國 平天下가 곧 수복이다.
問 : 이 장은 治國을 말하는 장인데 “仁으로 천하를 이끈다”라 하니 平天下를 설하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에게 善이 있은 다음에야”라고 하는 것을 보면 修身을 설하는 것 같은데, 왜 그런가.
위의
문답은 전9장 세주에서 가져온 것이다. 전9장은 齊家와 治國을 연대하여 설명한 장이고, 전10장은 治國과 平天下를 연대하여 해설한 장이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위의 인용문에서 질問者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 많이 있다. 종래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의 생각을 가지고서는 이 장들이 修身을 설한 장인지 齊家를 설한 장인지 治國을 설한 장인지 平天下를 설한 장인지 갈피를 못잡는다. 이 때문에 의문이 생긴
것이다. 齊家 治國 平天下 이전에 修身이 아니라 齊家 治國 平天下가 곧 修身이므로 전9, 10장의 모습이 이렇게 된 것이다. 주자의 답은, 질문에 못미치는 답이기는 하나 은근히 바른 답도 하고 있다. ‘身이라는 것은 齊治平의 本’이라는 말은 지극히 옳다. 齊家 治國 平天下는 修身인 것이다. 그런데 이 말에는 오해의 소지도 있다. 齊 治 平이 末이라고 하면 이는 틀리는 말이 된다. 齊 治 平은 한 그루 나무 이지 수신과 本末로 상대할 개념이 아니다. 齊 治 平의 末은 治人 등이다. 이 말이 헛갈기도 할 것이다. [본문과 함께]에서 다룬다.
순임금께서 공손되이 오전을 빛내시니, 오전이 잘 이루어졌다 (『서경』「순전」 ).
설아, 백성이 불목함은 오품이 순조롭지 않은 때문이다. 너는 司徒니라. 삼가 오교를 펴되 관유함을 잊지 말찌니라(契 百姓不親 五品不遜 汝作司徒 敬敷五敎在寬『서경』「순전」 ).
하늘의 질서에는 불변의 도리가 있다. 하늘이 내게 오전을 바로 하라 하시니 五를 두터이 할찌니라(天敍有典 勑我五典 五惇哉.『서경』「고요모」)
천하의 達道(달도)가 다섯인데, 君臣 父子 夫婦 昆弟(곤제) 朋友가 그것이며(『중용』 제19장))......
后稷이 인민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오곡을 심으니, 오곡이 무르익어 인민이 잘 먹고살게 되었다. 배불리 먹고 몸이 따뜻하며, 안일하게 거하기만 하고 가르침이 없게 되면, 금수에 가까워지는 것이 인민들의 생리이다. 聖人은 이를 우려하여 契(설)에게 司徒(사도)의 직을 행하게 하여 인민들에게 인륜을 가르쳐 주었으니, 인륜이란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이다(『맹자』 「등문공」 상 제4장).
오륜은 유학이 발명한 고유한 사상이다. 이 사상이 대학에서 格物 修身으로 원론화되었고, 新民과 齊家 治國 平天下로 실제화되었다. 達道의 達은 八達路(팔달로)의 達이다. 다섯 관계를 達道라고 하는 것은 고금동서에 두루 통하지 않는 데가 없다는 의미이다. 普通의 道라는 의미이다. 발명이 고유하기는 하지만 특수한 道는 아니고 누구에게나 어느 시대에나 두루 적용되는 道이다. 오륜은 家와 國과 天下 사람들의 관계이다. 이 관계에서 다듬을 情이 유래하고, 이룰 지식이 유래한다. 格物致知이며 格物修身인 것이다. 格物사상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오륜을 살펴 보면서 오륜에 대한 생각을 적어 보겠다. 君臣 父子 夫婦 등은 오늘날 그 모습은 많이 변화하였다. 변화가 심하여 이제는 혼란해지고 말았다. 이것이 어지러워지면 세상이 잘 굴러 가지 않게 된다. 현대의 혼란(이러한 혼란은 원론적으로 항상 존재한다. 비록 오늘의 현상만은 아니다)을 정리하고 미래의 설계도를 내기 위해서는 인류 역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오륜을 새롭게 조명해 내야 한다.
'오늘날도 군신유의만 빼면 아직도 유효......' 어느 교양 책에 있는 내용이다. 君臣有義는 오륜을 소개하는 사람들이 오륜 가운데서 처리곤란하게 여기는 것이 되었다. 오륜에서 빼고 싶어한다. 오륜은 오常이라고도 한다. 常은 不變의 뜻이다. 그런데 오륜에서 君臣有義를 빼야 한다면 常이 아니라 變이다. 오륜에서 빼고자 하기보자는 불변의 의미를 먼저 구하야야 옳다. 80년대에 들은 이야기 하나 한다. 울산에 있는 현대의 어느 공장을 견학하고 온 사람이 하는 말: '야! 정주영 왕국이더라.' 君臣관계의 핵은 경제이다. 경제가 있는 곳에, 돈이 있는 곳에, 먹을 것이 있는 곳에 君臣의 관계가 있다. 사람이 먹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군신관계는 필요 없게 된다. 먹지 않고 살 수 있지 않기 때문에 군신관계는 늘(常) 있는 道, 상도이다. 이 때문에 오常이라고 부른다. 특히 먹고 사는 문제가 생을 유지하는 기본이기 때문에, 君臣有義, 여기에 나머지 륜의 성패가 걸려 있게 된다. 이 때문에 부자유친과 함께, 오륜에서 앞뒤를 다투어 나열된다.
4.1.1.君(과 口) 君이란 글자의 소리(발음)는 「쥔」이다. 「쥐다」의 「쥐」로서 「다스린다」는 뜻이 기본이다. 君은 尹(윤)과 口(구)가 합쳐진 글이다. 君의 소리는 尹에서 땄다고 한다. 「윤」의 소리도 「쥔」인 것을 알만 하다. 尹은 다스린다는 뜻이다. 尹은 又(우)와 丿(별)의 회의 문자라고 한다. 又는 집게 모양이라고 하니 무엇인가를 「집다, 쥐다」의 뜻을 그렸고, 丿은 어떤 물건을 뜻한다고 하니까 尹은 무엇을 쥐고 있는 모습, 집행하는 모습을 그린 글자이다. 尹은 執事, 執物의 뜻이다.
口는 '입'이다. 중국인들의 사전적 설명에 따르면, 君의 口는 이런 의미이다. '君이란 입으로 명령하여 다스리는 사람.'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입으로 다스려야 할 이유까지 밝혀야 한다. 그러려면, 口를 목적어로 볼 필요가 있다. 君은 입을 다스리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태학』적으로 말하면, 「인민의 입과 관련하여 발하는 마음을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君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人口, 食口라고 할 때 口는 경제적 측면에서의 사람(homo economicus)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君은 사람, 사람의 입, 사람의 먹을 것을 다스리는 사람, 사람의 營生에 관하여, 아울러 그것과 관계한 안보에 관하여 발하는 마음을 다듬는 사람이다. 食以爲天(사이위천), 「밥을 하늘로 삼는다」는 뜻이다. 생명 있는 것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을 수뿐이 없게 되어있다. 口는 경제가 유래하는 곳이며, 君이 유래하는 곳이다. 밥이 바로 君이기도 하다. 우리말 밥의 높임말은 「진지」이다. 「진지」라는 말은 유래를 따지면 君에서 온 말일 것이다. 君主(군주) 또는 君子와 같은 계통의 소리인 것이다. 엄마는 맘마이듯이, 君-군주(군자. 중국 발음은 '쮠즈)는 「진지」 밥이 되는 것이다. 君의 일은 人口를 다스리는 일이 핵심이다. 밥을 떠나서 먹고 사는 것과 무관한 君이란 없는 것이다. 나의 밥줄을 잡쥐는 사람이 君이다.
4.1.2.오늘날 君 나라 공동체로 말하면, 유권자 民이 君이며, 나라를 경영하기 위한 분담금 즉 세금을 내는 국민이 君이다. 그 세금을 받아 먹고 사는 사람은 臣이다. 공무원을 사복(私僕)에 대하여 公僕(공복)이라 한다. 나라(公)의 종인 것이다. 먹고사는 일에 있어서는 경영주가 君이다. 경영주는 생산과 판매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하고 주선하는 사람이다. 현실적으로 경영주의 이런 功이 없으면 복잡한 현대생활(옛날도 마찬가지)에서는 혼자의 힘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기가 어렵다. 경영주는 종업원들의 밥줄을 책임지는 君이다. 누군가 오륜을 흉내내어 犬公(견공)의 오륜이라는 것을 지었는데 君臣有義에 이런 설명을 달았다. 「주인을 물지 않는다.」 군신유의를 먹고 살 게 해 주는 주인과의 관계로 파악한 것이 놀랍다. 君臣의 관계는 오늘날 매우 복잡한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바른 군신관계를 닦아 바르게 먹고 살고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투자(格物致知 正心修身)가 필요하다.
부모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대략 일년 배우면 그 만인 학교의 교사를 부모 같이 모시기에는 부모 같은 스승이 너무 많고, 교사의 처지에서 보면 자식과 같다는 그래서 弟子라고 하는 그런 제자가 너무 많다. 이런 마당에 사부일체는 맞는 말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부일체까지는 아니라도 무언가 버릴 수 없는 미련이 있어서 스승의 날을 만들어 기념하고 있다. 君의 경우도 이런 식으로 보면 맞지 않는 이론이다. 오늘날은 君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보면 師父一體(사부일체)보다 君父一體(군부일체)는 더 위협을 당하고 있는 논리로 보이다. 정치적으로는 유권자의 날이 임금의 날이다. 경제적으로는 경영자의 날이 임금의 날이다. 노동자의 날 노동절은 신하의 날이다(노사를 대비한 노동자일 경우). 君師父一體는 다만 옛이야기는 아니다. 君師의 모습이 다양하게 변화하였을 뿐 그 의미는 여전히 새롭다. 처음에는, 부모가 나의 君이며 師이다. 부모는 나를 낳아주었을 뿐 아니라 사냥하고 농사지으면서 나를 먹여 살리며 나를 위험에서 지켜준다. 부모는 스스로 터득한 것을 가지고(이를 다른 말로 하면, 德으로) 자식에게 사람 사는 법을 가르쳐 준다. 사냥하는 법, 농사짓는 법, 말과 행동 등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가르쳐준다. 부모는 나의 틀림없는 君師인 것이다. 공동체가 커져 감에 따라, 자식을 먹여 살리고, 위험에서 지켜주고, 사람 사는 법을 가르치는 일을 부모가 온전히 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고, 이리하여 君師의 직분이 나타났다고 한다. 君은 부모가 하였던 일 가운데 먹여 살릴 터전을 마련하고 그것을 지키는 일을 전문으로 한다. 경제와 안보를 전적으로 맡은 것이다. 師는 역시 부모의 일 가운데 가르쳐서 사람으로 살아 갈 수 있게 하는 가르침의 전문적인 부분을 맡는다. 이것이 오늘날 알고 있는 君이니 師니 하는 직분이다. 그러므로 부모의 공이 이루어지려면 전문화된 君師의 공이 더해져야 한다. 나의 생이 이루어지려면 君師의 공이 더해져야 하는 것이다. 낳아 기르고, 먹여 기르고, 가르쳐 기르는 공이 본디 부모 한 사람의 공이며 이 공이 있어야 나의 생이 이루어지는데, 君과 師가 각기 그 공을 대신하였으니, 그들을 길가는 사람처럼 볼 수 없는 것은 자연이다. 이런 의미에서 君師父一體란 사상이 나오게 된다.
4.1.4.事必無方과 事必有方, 그리고 隱(은)과 犯(범) 事必無方사필무방: 섬기는 데는 반드시 方이 없게 할 것. 事必有方사필유방: 섬기는 데는 반드시 方이 있을 것. 方이란, 절차 범위 등을 말한다. 전에 오 아무개라는 기자가 자신의 아파트 근처에서 괴한에게 칼맞은 사건이 있다. 가해자는 어떤 군인들이다. 칼로 찌른 사람은 중사라고 하는 것 같고 위로는 소령, 장군으로 올라간다. 기자의 글이 군대에서 밥먹고 사는 사람들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였나 보다. 장군은 지시한 적이 없다고 한다. 지시 안했다고 하는 말에 긍정이 간다. 군은 조폭이 아니니까. 그러나 보복 의도는 충분하게 하급자에게 전달이 된 것이다. 하급자는 장군의 명령이 아니라 의도에 따라, 의중을 파악하고는 실천 즉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을 것이다. 밥먹고 사는 차원, 밥줄이 달린 일에서는 이렇게 하면 안된다. 色難(색난. 『논어』 「위정」 제8장)이란 말이 있다. 부모를 섬기는 일에 있어 부모가 '이거 좀 해 다오 저거 좀 해 다오' 하기 전에 부모의 얼굴색만으로도 부모의 뜻을 간파하여 부모의 뜻에 응답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이렇게 되어야 수준 높은 孝라는 뜻이 담겨 있는 말이다. 밥먹고 사는 차원의 군신 관계에서는 상관의 의중을 살펴 처신하면 안된다는 것이 有方이다. 섬기는 데, 봉사하는 데에 정해진 절차 규정이 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해서는 안되는 일이 있으며, 할 수 있는 일 해도 되는 일, 해야하는 일이라도 절차가 있다. 마음대로 하면 안된다. 이것이 有方이다. 신하의 처지에서 事必有方이라면, 君(밥줄 차원의 상하관계에서 윗사람 포함)의 처지에서는 使必有方(사필유방)임을 알만 하다. 「아래사람 부리는 데(使) 반드시 예가 있는 법」인 것이다(君使臣以禮군사신이례. 『논어』 「팔일」 제19장).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 먹고사는 道이므로 군신관계의 적용을 받는다. 色難은 無方의 경우이다.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면 하면 된다.
隱(은): 은밀하게, 간접적으로, 온유하게 諫함. 犯(범): 맞닥뜨려, 확실한 태도로, 적극적으로 諫함. 은과 범은 군사부의 과실에 대처하는 규칙이다. 군사부가 과실을 범하는 것을 신하와 자식과 제자의 처지에서 어떻게 대처할 지를 보여준다. 隱(은)은, 과실을 諫하여 시정을 요구함에 있어 상대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처신하는 것이다. 犯(범)은, 상대의 사적인 감정을 개의치 아니하고 다만 직분을 수행하는 義에 따라 禮(절차)에 따라 諫하여 시정을 요구하는 것으로 隱과 반대이다. 군사부 섬기는 일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동그라미는 有(긍정)를, 가위표는 無(부정)를 나타낸다.
목숨이라고 한 것은 목숨을 바칠 것이냐 하는 것인데 삼자 다 목숨을 다하여 섬겨야 한다. 죽음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삼자가 다 삼년상이다. 致喪은 모든 슬픔을 다 하는 것(致는 格物致知의 致이다)이고, 方喪(이 경우의 方은 비긴다는 뜻이다)은 부모상에 비겨 한다는 뜻이며, 心喪은 상복은 입지 않고 부모상에 준하는 마음만으로 한다는 뜻이다. 부모상보다는 낮은 수준이다. 오늘날 부모의 상도 혼란한 판에 君師 상의 실제가 어떠해야 하는지.
4.1.5.군신義 감상
君臣有義는 家를 넘은 차원에서 경제와 안보에 대한 인륜과 그 준칙이다. 경제와 안보를 굳건히 하는 준칙을 利로 삼지 않고 義로 삼았다. 利를 얻는 원칙을 義로 본 것이다. 父子有親은 家를 무대로 한 인륜과 그 준칙이다. 家를 家이게 만드는 것, 즉 存家의 핵을 親으로 삼고 있다. 親은 낳아주고 길러주는 은혜를 바탕으로 한 사랑이다. 君臣간의 사랑과 利는 義 가운데 있고, 부자간의 義는 親 가운데 자리한다.
▫ 葉公(섭공): 우리 고을에 마음이 곧은 사람이 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아버지가 양(羊)을 훔쳤는데 아들이 증인을 섭니다. ▪ 공자: 우리 고을의 곧은 사람과 다르군요. 아버지는 자식의 잘못을, 자식은 아버지의 잘못을 서로 숨깁니다. 곧은 마음은 바로 이런 가운데 있다. - 『논어』 「자로」 제18장 -
▫ 桃應(도응): 舜(순)이 천자이고 皐陶(고요)가 사관(법 집행하는 관리)이다. 舜의 아버지가 살인을 했다면 皐陶는 舜의 아버지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 맹자: 잡아들인다. ▫ 桃應: 그러면 舜이 가만있겠습니까. ▪ 맹자: 법이 그런데 어찌 하겠느냐. ▫ 桃應: 그럼 舜은 어떻게 할까요. ▪ 맹자: 舜은, 天下를 헤진 짚신 버리듯 버리고서는, 몰래 아버지를 홈쳐 없고 도망을 하여 바닷가에 자리 잡고는 천하를 잊고 종신토록 欣然(흔연)이 부자의 도리를 즐길 것이다. - 『맹자』 「진심」 상 제35장 -
家와 國에는 이 같은 차이가 있다. 이 차이는 「義냐 親이냐」에서 온다. 親에 바탕을 둔 사랑은 구체적으로 孝와 慈로 표현한다. 義에 바탕을 둔 君臣간의 사랑은 忠(신하의 마음에 이는 情)과 恕(君의 마음에 이는 情)이다. 따라서 治國 平天下란 義에 바탕을 두고 忠과 恕를 다듬어 내는 일이며 동시에 다듬기 위하여 君臣을 포함한 그와 관련한 物들을 연구하는 일이다. 義로 보면 천자가 꼭 순임금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親으로 볼 때 아버지는 바꿀 수 없는 존재이다. 꼭 천자만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모든 자식은 아버지에 대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다. 맹자가 말씀하시기를,'舜임금이 부모섬기는 도리를 다하니 아버지 고수가 드디어 기뻐하게 되었고, 아버지 고수가 기뻐함에 이르자 천하가 감화하였고 천하 부자의 도가 정립되었다-'부자 관계란 이런 것이구나'라고 사람들이 알 게 되었다(「진심 하」제28장)'고 하였는데, 도응과 맹자의 대화를 통하여 부자의 도가 어떠한 것인지가 드러난다.
4.2.1.養志(양지)와 養口體(양구체)
曾子가 아버지를 봉양할 적에, 음식에 반드시 술과 고기가 있었다. 상을 물릴 때는 반드시 아버지에게 남은 것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를 물었다. 아버지가, 「남은 것이 있느냐」고 물으면 반드시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증자의 아들 元이 曾子를 봉양하는데 반드시 술과 고기가 있었다. 그런데 상을 물릴 때 누구에게 줄 것인가를 묻지 않았다. 曾子가 「남은 것이 있느냐」고 물으면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남은 음식을 다시 올리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養口體인데 증자 같은 경우는 養志하였다고 하겠으니 부모 섬기는 일은 曾子처럼 하는 것이 옳다. - 『맹자』 「이루」 상 제19장 -
부모가 자식을 기르는 데 음식이 필요하듯이(사랑은 빈손으로 하는 것이 아니므로)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데도 물질이 필요한다. 曾子의 養志(부모의 뜻에 순응하여 봉양하는 것)에도, 아들 元의 養口體에도 음식, 특히 노인의 입에 맞는 술과 고기가 있다. 曾子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의 의중을 미리 파악하여 남은 음식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를 물었다. 아버지는 남은 음식을 또는 음식을 남겨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누구에게 주고 싶다. 증자가 늙어서 아들 元의 봉양을 받을 때 증자는 元에게 이런 질문을 받지 못했다. 아버지 증자가, 「남은 것이 있느냐」는 물음은 아버지의 의도가 나타난 것이다. 없다고 한 것은, 부모의 의중을, 귀로 듣기 전에 듣고(聽於無聲청어무성. 소리 없는 데서 들음), 안색을 살피기 전에 파악하여(視於無形시어무형. 형체 없는 데서 봄) 받들어 섬기는 것(養志의 높은 차원)에 비하면 부모 섬기는 정도가 천양지차이다.
4.2.2.生事之以禮 死葬之以禮 祭之以禮(봉양, 장사, 제사를 예법에 의거하여 함) ▫ 孟懿子(맹의자): 孝란 무엇입니까. ▪ 공자: 無違(무위)이니라. (번지가 공자를 마차로 모시고 있다) ▪ 공자: 孟孫(맹손)이 나에게 孝에 대해서 묻기에, 「無違」라고 답해주었는데 아무 말이 없더라. ▫ 번지: 무슨 뜻입니까. ▪ 공자: 봉양하는 것, 장사지내는 것, 제사지내는 것을 禮법에 따라 하라는 뜻이다. - 『논어』 「위정」 제5장 -
孟懿子는 공자의 「無違」를 부모의 말씀 또는 뜻을 어기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것도 분명 孝의 일이다. 그러나 공자의 뜻은 이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제자 번지에게 「無違」의 뜻을 일러주려고 말을 붙인다. 「無違」는 직역하면 「어기지 말라」는 뜻이다. 그 내용은, 예법를 어기지 말고 지켜 섬기라는 의미라고 한다. 어느 도시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일제 때 면장을 하던 사람의 공덕비를, 지금은 동사무소를 새로 지어 사용하고 있는, 옛 읍사무소 터에 세우는 문제로 시끄러운 적이 있었다. 후손들이 그 시와 거래를 하였다. 동사무소가 점령할 일부를 내줄테니 동사무소 터에 우리 아버지 공덕비를 세우게 해 달라. 이 거래가 성사되어 공덕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아직도 그것이 서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런 것이 違, 불효니까,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 無違이다. 그런데 후문에 따르면, 당시에 공덕비에 이름이 새겨진 주인공이 살아있었고 그 자신이 이 일을 지휘하였다고 한다. 이럴 경우 아들의 처지에서 공의자가 이해했을 無違에 따라 판단한다면 아들은 孝를 행한 것이 된다. 이런 것이 걱정이 되어서 번지에게 그 뜻을 알려 주었을 것이다. '以禮'를, '禮를 갖추어'라고 이해하시는 분이 있다. 잘못이다. '以禮'는 '禮법에 따라서' 라는 의미가 있다. 禮는 理이다. '以禮'는 '이치에 맞게, 人情에 맞게, 인심의 공통분모에 맞게'라는 뜻이다(이런 이치와 인정과 인심의 공통분가 표출된 것이 禮, 法, 제도, 관습 등이다). 겉으로 보이는 , 服飾(복식), 절차, 형식, 의식, 의전 행위가 아니다. 이런 의미를 새기기 위하여 전에는 以禮라는 이름도 많았다. 以를 돌림으로 하면 以仁, 以義, 以禮, 以知, 以德, 以忠, 以文 등의 이름을 얻을 수 있다.
4.3.1.부부유별과 男女有別 男女有別과 夫婦有別은 모양이 비슷하다. 이 때문에 서로 혼용하기도 한다. 혼용은 안되어야 한다. 혼용하면 夫婦有別의 개념이해를 어렵게 만든다. 夫婦有別은 男女有別의 상위개념(상위 폴더)이다. 단위가 다르다. 夫婦有別을 지키기 위한 구체화된 표현(폴더)이 男女有別이며, 男女七歲不同席(남녀칠세부동석)은 男女有別의 한 실제사 즉 조목(남녀유별 폴더의 파일)이다.
夫婦有別의 別은 色의 別이다. 일(事), 즉 남자일 여자일의 別이 아니다(이렇게 이해하는 別은 男女有別의 別에 속한다). 別은 政事로 구분하면 政에 해당한다(政과 事의 구분은 家政 家事의 구분과 같다). 色의 別이라고 말하면 色에 눈이 뜬 사람이라면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다. '아하! 고거구나!' 夫婦有別의 夫婦를 남편과 아내라고 보면 이해가 틀어진다. 갑이란 夫婦(갑돌이 갑순이), 을이란 夫婦(을석이 을순이),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有別이란, [갑돌 갑순 부부]와 [을석 을순 부부] 사이에(부부들 사이에) 色의 別이 있다는 뜻이다. 갑돌이와 을순이, 또는 을석이와 갑순이는 色의 즐거움을 공유하면 안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夫婦有別은 성윤리인 것이다.
성교육을 하는 어느 여교사의 말이다. '우리는 유교적 환경 때문에 성윤리라는 것이 없었다.' 정말 그럴까. 어느 사회나 食色(음식남녀)을 보존하기 위한 원초적인 법이 있다. 남의 것을 빼앗으면 어떤 벌을 받고, 남의 여자를 강탈하면 어떤 벌을 받고 등등. 유가 사회에도 그러한 법이 없을 수 없겠다. 부부유별이라는 점잖은 표현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男女七歲不同席, 일찍부터 성교육을 하고 있다. 夫婦有別이란 남녀간에 발하는 情, 色을 다듬는 최소한의 한계를 규정한 것으로 齊家의 기초이기도 하다. 최소한의 한계라는 것은 성규범의 핵을 夫婦 즉 결혼한 부부들로 국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한계를 망각하고 고추와 마늘을 기준으로 別을 확대 적용하게 되면(극단적으로는 자식을 낳기 위해서가 아니면 교접을 말라는 것, 어떤 이유로도 부부가 아니면 교접하면 안된다는 것 등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상 불가능 한 것들이며 이것을 지킨다고 세상이 잘 돌아가지 않는다) 세상은 色이 주는 복을 크게 할 수 없는 色의 지옥이 된다. 반대로 이 한계를 무너뜨려도 역시 사람의 세상이 되지를 못한다. 家 國 天下를 보존할 수 없게 된다.
4.3.2.一夫一妻와 多妻 多夫의 念 -食과 땔 수 없는 色- 禮라는 것은 夫婦를 夫婦이게 하는, 즉 夫婦를 보존하는 데서 출발하였다고 한다(『예기』 「내측」). (食)色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 禮의 시발임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食色은 무한한 것이 아니다. 함께 즐기는 상대도 무한한 것이 아니지만 즐기는 자신의 육체와 경제력과 등등 色을 즐기는 데 관계하는 요소 등도 역시 유한하다. 제한된 것을 가지고 서로 나누어야 하니 그것을 구하는 데 법이 생기게 된다. 함부로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禮라는 것이 食色을 구하고 즐기는 데 대한 욕구를 조절하는 원초적인 법도 제도로서 자연 발생하는 것이고, 이것을 통하여 食色을 담아낸다. 최초에는 오늘날 혼인례와 같은 그런 혼인례가 있지 않았을 것이다. 禮라고 할 만한 禮가 없을 시절에는 色은 힘있는 사람에게는 빼앗을 수 있는 물건이었을 뿐임도 짐작이 간다. 이런 환경에서는 色의 樂을 안정적으로 즐길 수 없다. 이 때문에 예법이라는 것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런 예법이 지키고자 하던 것은 色을 色이게, 食의 경우라면 食을 食이게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色을 色이게 하는 것은 혼인례, 혼인제도로 나타난다. 혼인의 제도는 사회실정에 따라 개개인의 실정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대체는 一夫一妻, 一夫多妻, 一妻多夫이다. 色은 '오로지 色'이 있을 수 없다. 「색욕만 가지고는 색욕을 색욕이게 할 수 없다」 이 말이다. 혼인이라는 것이 色欲을 실현하는 방편이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다만 色'이 아니라 여러 이유가 복잡하게 얽혀지게 된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여러 이유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경제 즉 食의 문제이지만. 하여튼 다만 色 문제만은 아니다. 정략결혼이라는 것도 色의 훌륭한 기능이다. 정략이란 것도 사실은 食의 문제이다. 돈 많은 사람이 여자 구하기 쉬운 것도 色의 밥그릇 문제 때문이다. 色에 있는 食의 요소를 잘 인식하는 사람은 삶이 순탄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만 色만 쫓는 사람은 된 대가를 치루게 된다. 다람쥐는 겨울 준비로 도토리를 주워서 나르는데 이 시기에는 암놈을 많이 거느린다고 한다. 노동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월동에 들어가면 암놈들을 내쫓는다고 하는 말이 있다. 사실인지는 모를 일이나 色에 경제의 요소가 개입한다는 의미는 얻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클린턴이 대통령 임기를 끝내고 이혼을 당한다면 그는 빈털털이가 되는데, 돈 많은 여자와 결혼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色 가운데에는 食이 함께 한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色을 담아 내는 환경은 一夫一妻의 그릇으로 족한 경우도 있고, 一夫多妻의 그릇이라야 담을 수 있는 경우도 있고, 一妻多夫라야 되는 실정도 있다. 고정된 것이 아니다. 처첩을 두는 사람의 경우 대부분이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이다. 월급쟁이 신세로는 처첩을 둘 필요도 적지만 엄두도 못낸다. 무언가를 경영하는 처지에 있으면 항상 사람이 모자라게 되어있다. 극단적인 예로 일인군 시대 임금의 경우 중전 하나에 자식이 없다거나 중전하나에 외아들이라거나 이런 경우라면 임금의 자리는 위태불안이다. 자리 문제가 아니라 나라가 위태불안하다. 시끌벅적 집안끼리 다투고, 대군들끼리 세자자리를 놓고 심하게는 살생까지 하는 일이 있더라도 임금에게는 자식이 많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嬪(빈), 貴人(귀인), 昭儀(소의), 淑儀(숙의) 등으로 불리는 첩이 많이 있다. 임금이 자기 밥그릇을 지키는 데에는 유리하기 때문이다. 또 기업을 하는 사람들도 사람 찾기 힘이 든다. 그래서 사위를 동원하기도 하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자식을 많이 얻어(사위도 더 얻을 수 있다) 경영하게 하는 일이다. 이렇게 하면 色과 食의 안전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것도 色의 축복 가운데 하나이다.
-강요되는 일부일처- 오늘날은 일부일처만을 미풍양속이라고 하여 일부일처에 손을 들어 주었다. 한 남자를 두 여자가 사랑한다. 안되는 일로 통한다. 두 여자, 아니 세 여자라도 한 남자 사랑하면 안될 일이 없는 데, 안된다고 말들한다. 그리고는 괴로움을 만들어 글도 짓고, 노래도 부르고 하여 스스로를 달래기도 하고, 이런 수요를 노려 글과 노래 등을 상품화하기도 한다. 왜, 안된다고 하는 것일까. 그게 된다면 그 반대는 어떠할까. 여자 중심 세상이면야 당연하다. 보존이란 무엇을 무엇이게 하는 행위이다. 一夫一妻 일색이라는 한 가지 그릇만으로는 色이 주는 복을 제대로 담아낼 수 없다. 제대로 담아내기에는 그릇이 보잘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일부일처제의 보잘 것 없는 그릇을 땜질, 보완할 物이 필요한데 이혼과 色의 영업화(섹스 관련 돈벌기 예를 들면 매춘, 접대부 직업소개, 이른바 성인몰 등), 그리고 色의 음지화(몰래 色을 즐기는 것으로서 현지처, 내연의 처, 묻지마, 원조 등)가 그것이다. 법에서, 一夫一妻를 미풍양속이라고 본다(법의 해설에서 그렇게 말한다). 이는 一夫一妻(제도를 포함하여 그 제도에 얽매인 色에 대한 마음) 하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현실을 외면하고 하는 말이다. 一夫一妻만을 善으로 규정하는 습속하에서는, 불륜이 아닐 것을 불륜으로 규정하게 되고 이런 불륜의 낙인은 결국 천륜을 어기도록 한다. 술집 아가씨와 바람을 피웠다. 그 여자가 애를 뱄다. 울면서 남자의 집으로 찾아왔다. 남자는 부끄럽고 겁이 나서 이웃으로 도망을 쳤다. 남자의 아내가 시동생에게 연락을 한다. 수습 좀 하라고. 결국 위로금을 많이 주어 보냈다. 애를 떼고 다시 잘 살아 보라고. 도망했던 그 남자는 평생 아들을 얻지 못했다. 하늘이 미리 알고 아들을 보냈는지도 모를 일인데, 그 아들(딸이었을 수도 있지만 딸이면 어떠합니까)을 떼고 말았으니 천륜을 어긴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것이, 강요된 일부일처, 소위 미풍양속에 주눅이 든 오늘날 사람들의 천벌 받을 행태이다. 남자들의 중전은 남자들의 이러한 작태를 조장하고 있다. 미혼모, 낙태, 해외입양, 태아유기 등등은 불륜아닌 것을 불륜으로 취급하는 데서 벌어지는 반천륜이다. 그 때 수습을 맡았던 동생은 이제 70중반의 노인이 되었다. 그 때 천륜 거스른 것이 후회스럽다고 한다. 일부일처제는 자연 같지만 비자연이다. 이런 제도에 주눅이 들어 수습할 생각을 못하고 도망을 가면 천륜을 어기게 된다. 천륜을 당당히 맞이하는 色의 대장부가 그립다. 불륜이란 다만 남녀가 色을 나누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夫婦유별을 거스르는 것이 불륜이다. 一夫一妻, 多妻, 多夫 모두 공존할 수 있고 그래야 色이 주는 복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은 이론(생각)이고 그 실제에 있어서는 이러한 식의 공존은 매우 어렵다. 色의 진실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보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의식 수준과 교육과 장치(제도) 등을 새롭게 하기도 힘든다. 그리하여 힘있는 성(대개는 남성)을 중심으로 色의 통일이 이루어진다. 힘 없는 층(대개는 여성)은 거기에 승복하여 안정을 이룬다. 오늘의 미풍양속이라고 하는 일부일처도 어떤 힘에 의한 통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은 제국주의 적인 데가 있다. 불순한 상업주의적인 데가 있다. 가족을 외소하게 함으로써 이득을 보려는 힘센 세력의 사심이 있다. 밤거리의 사랑스런 여인들이 길가는 남자를 유혹하는 말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영업용도 타보세요.' 이 영업용 같은 상품이 일부일처의 그릇이 수용하지 못하고 쏟아버리는 色의 福을 상품화한 것이고, 이 상품들이 또 일부일처제로 꾸려지는 가정을 더욱 외소하게 만들어간다.
-경계해야 할 色의 鄕原- 일부일처도 좋고 일부다처도 좋고 일처다부도 좋고, 좋은 사람 좋은 곳에서는 각기 나쁜 것이 없다. 이런 것을 제도화할 기술(행정적이거나 법적)도 모자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일부일처만을 인정한다. 완전한 제도라는 것은 사실 꿈일 수 있다. 그러나 色의 문제를 두고 일부일처에 주눅 든 생각에 치어 천륜을 어기는 일은 경계해야 한다. 천륜은 인륜 외에 따로 있는 倫이 아니라 人倫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 人倫이 人倫인 그것, 인륜의 본질을 말한다. 이 본질을 멀리하게 하는 요인으로 色의 상업화와는 반대되는 듯한 무엇이 있다. 色에 근엄한 사람들. 色의 鄕原(향원)들(『논어』 「양화」 제13장. 『맹자』 「진심」 하 제37장). 공자말씀, '향원은 德을 교란하는 적'이다. 色의 향원은 色의 德을 교란하는 사람들이다. 色의 진실, 色의 현실을 외면하거나, 비방하거나, 왜곡하거나 하는 향원을 멀리하고 色의 대장부로 나아가야 한다.
-아담과 에와를 생각하며- 최초의 부부라고 하는 아담과 이브. 최초의 色의 즐거움을 누린 부부. 위와 같은 생각이 가능하다. 이 생각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해본다. 이 부부가 자식을 낳았다. (1)에와가 외아들을 낳았다. (2)외딸을 낳았다. (3)아들과 딸을 하나씩 낳았다. (4)일남다녀를 낳았다. (5)일녀다남을 두었다. *다섯 가지의 경우 어떻게 자손을 번식하였을까. 이것이 그리스도교 경에 등장하는 아담과 에와 일가의 色에 관한 그럴 듯한 그림이다. 色은 사람들을 축복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꿈틀대는 物이다. 色에 관한 규범이 다섯 륜의 하나이니까 색의 즐거움도 인생 살맛의 5분의 1이라고 계산할 수 있다. 그렇게 계산하면 틀릴 것이다. 그것이 전체일 수도 있다. 몸이 늙어도 色은 살아있다. 남자 나이 70이 되어도, 여자나이 60이 넘어도 色의 욕구가 있다고 한다. 망측한 소리가 아니라 사실이다. 홀로 사는 노인들의 色 문제를 외면하고 복지국가 운운하는 것은 현실을 모르는 소리일 만큼 노인들은 色에 굶주려 있다. 마지막 배설을 하는 것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인생이다. 色은 인류의 시작이며 인생의 종이다. 色은 백복의 근원이다. 부부(의 色)에서 인류의 시작을 생각한 견해나 부부에서 禮의 시작을 본 것이나 같은 사고일 것이다.
천천히 걸어 어른을 앞서가지 않는 것을 弟라 하고, 빨리 걸어 어른을 앞질러 가는 것을 不弟라고 한다. - 『맹자』 「고자」 하 제2장 -
序는 우선권에 관한 것이다. 長幼의 序는 물질과 시공의 제한성(모자라는 것) 때문에 생긴다. 젊은이가 가는 길이 있고 연장자나 상위의 사람들이 가는 길이 있는 등 저마다 갈 길을 각자 가지고 있다면, 젊은이들이 어른들을 앞질러 갈 일도 없고 후배가 선배를 앞질러 갈 일도 없을 것이다. 한 길을 통하여 어른 아이가 같이 가려하니 序가 생기는 것이겠다. 승진할 사람은 많고 자리는 적기 때문에 서열이 생기는 것이 아니겠는가. 長幼의 관계는 기본이 勢와 시공의 제약성 때문에 오는 것이지만 실행은 세에 따라 하는 것이 있고 明德(인의)에 따라 하는 것이 있다. 힘이 있다고 반드시 먼저는 아닌 것이다. 幼가 먼저이어야 할 경우도 長幼의 序에 포함될 것으로 본다. 序에는 자애로움보다는 따끔한 회초리, 자애로운 회초리가 있다. 짐승의 세계에서는 長幼의 序가 그 세계를 유지하는 法이다(나이에 따른 장유는 아니겠지만). 序를 지키지 않는 짐승은 즉시 보복을 당한다. 강한 놈이 배부르기를 약한 놈은 기다려야 하고, 어떤 짐승은 강한 놈이 먹는 근처에 얼씬도 못한다. 또한 이 序를 지키지 않으면 개인적인 피해 이상으로 공동체가 무너지기도 한다. 旣得權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매일 뿔로 들이받으며 序 매기는 일에 치중하다가 보면 그 공동체는 자멸하고 말 것이다. 기득권을 잡은 놈에 대하여 승복하고 비록 들러리라 하더라도 그것이나마 설 수 있는 것을 고맙게 여기며 관대하게 넘어가야 해가 없다. 그러다가 기득권을 잡은 놈이 늙거나 사고를 당해 힘이 없어지면 그 때 치열하게 도전해서 그의 기득권을 일시에 빼앗으면 된요. 사람의 공동체도 기본 사정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長幼 사이에, 기득권 층과 그렇지 못한 층 사이에,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勢의 긴장을, 序가 있음을 인정하고 序를 위한 갖가지 제도를 마련하고 교육하는 일은 나머지 4륜의 성공에 직결되는 일이다. 長幼 간의 序를 배우는 처음은 가정에서의 형제관계이다. 물론 부모에게서 배우는 것은 기본이고. 이 관계에서 발하는 明德, 즉 弟를 다듬으면서 序의 따끔한 맛을 보게 된다. 弟를 밝히는 과정에서 아우가 형을 넘을 수 없는 한계도 맛본다. 일종의 좌절 체념이기도 한다. 이것이 序의 처음 경험일 것이다. 그런데 형제간의 관계는 모든 사람에게 부모가 있는 것처럼 꼭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朋友로 보충하게 되는데, 朋友의 사이는 長幼의 序를 배우는 더 넓은 무대가 된다. '천하에는 보통 세 종류의 존귀함이 있는데, 벼슬, 나이, 德이 그것이다. 조정에서는 벼슬만한 것이 없고, 지역사회에서는 나이만한 게 없고, 천하 인민의 차원에서는 德만한 것이 없다(天下有達尊三 爵一齒一德一 朝廷莫如爵 鄕黨莫如齒 輔世長民莫如德. 맹자 공손추 하 제2장).' 누가 벼슬과 나이와 덕 등에 따른 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 꾼다면 그것은 참으로 꿈일뿐 현실이 아니다.
朋友라는 것은 제 발로 걸어서 문밖을 나서는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생활에 영향을 주는 관계이다. 자식이 5,6,7세가 되면 친구들과 놀면서 인생수업을 한다. 해가 져서 밥 먹을 때가 되어야 집에 돌아온다. 長幼의 序를 형제간에서보다 실감나게 배우는 것이 바로 朋友 사이에서이다. 형제간의 관계는 同氣로서 長幼의 序와 朋友의 信이 크게 작용하는 관계이다. 이 때문에 朋友 간의 사랑을 弟라고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朋友라고 나이가 같은 사람만을 이르지는 않는다. 같은 직장의 상사도 나의 朋友가 될 수 있고, 임금도 나의 朋友가 될 수 있고, 연장자도 나의 朋友가 될 수 있다. 사서에 나타난 朋友의 모습이다.
멀리 있는 벗이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 『논어』 「학이」 제1장 -
저(자로)는 수레와 털옷을 朋友와 함께 나누다가 그것이 다 부서지고 떨어져도 유감이 안 생기기를 바랍니다. - 『논어』 「공야장」 제25장 -
曾子曰 나는 하루에 세 가지를 반성한다. 하나는 「남을 위한 일에 不忠하지 않았나」이고, 하나는 「朋友와의 교제에 不信은 없었나」이고, 하나는 「전수 받은 것을 제대로 익혔나」하는 것이다. - 『논어』 「학이」 제4장 -
子夏曰 ......부모를 섬기되 힘을 다하며, 임금을 섬기되 제 몸을 다 바치며, 붕우와 교제하되 말에 믿음이 있다면 비록 아직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그가 배운 사람이라 할 것이다. - 『논어』 「학이」 제7장 -
曾子曰 군자는 以文會友(이문회우)하며 以友輔仁(이우보인)하느니라. - 『논어』 「안연」 제24장 -
萬章: 交友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맹자: 나이가 연장인 것과, 신분이 귀하다는 것과, 유력한 형제가 있다는 것을 끼고 사귀지 않는 것이다. 벗을 사귄다는 것(友)은 그의 德을 사귀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언가를 옆에 끼고 사귀면 안되는 것이다. - 『맹자』 「만장」 하 제3장 -
朋友와 德은 서로 짝하는 말이다. 바늘과 실의 관계에 있다. 輔仁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됨됨이를 도와준다는 뜻이다. 以友輔仁은 벗과의 사귐을 통해서 輔仁한다는 의미로 벗을 주어로 삼아 문장을 만들면 「벗이란 輔仁하는 道」가 된다. 輔仁이란 글씨만 보면 벗 友가 자동으로 보여지게 한 것이다. 또, 벗은 文과 짝하는 말이다. 인생에 있어서 벗이란 직업을 통해서도 생기고, 봉사(예를 들면 군대 생활하는 것)를 통해서도 생기지만 지위와 돈과 권세에 구애받지 않고 평생 즐기는 벗은 學問, 學文하는 데서 생기는 벗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학교에 다니는 것은 사실 벗을 사귀러 다니는 것이라고 보아도 된다. 공부하기가 죽을 맛이고 공부 못한다고 별 천대를 다 받으면서도 가방 들고 학교에 머리를 들이미는 것은 어디에 뜻이 있겠는가. 벗을 사귀지 않으면 몸살이 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벗을 사귀는 장소로 학교만한 곳이 없고 글 배우며 사귀는 것만한 없다. 글 배우는 시기는 대체로 벌어먹고 살기 전이니 붕우사이는 밥줄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역할도 한다. 「友也者는 友其德이라.」 「以文會友하고 以友輔仁하느니라.」
孟子, 萬章에게 曰: 한 고을의 善士(선사)는 한 고을의 善士들과 사귀고, 一國의 善士는 일국 善士들과 사귀고, 천하의 善士는 천하의 善士들과 사귄다. 천하의 善士들과의 사귐으로 족하지 않으면 古人(고인)들을 尙論(상론.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논함)하는 것이다. 그래서 古人들의 詩를 읊고 책을 읽는데, 그 사람들의 처신이 어떠하였는지 모르면 안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시대를 논하게 되는데 이렇게 사귀는 방식을 尙友(상우)라고 한다. - 『맹자』 「만장」 하 제8장 -
尙은 上이다. 위로 올라간다는 뜻이니까, 尙友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역사의 인물과 사귀는 일이다. 전대의 문헌과 유물을 통하여 천고의 인물들과 사귐에도 信이 문제가 되고 있다. 옛 사람의 詩를 읽고, 그의 논설을 읽음에 있어, 그 시대 상황에 그가 어떻게 처신하였는지를 따지지 않으면 그와 사귄다고 할 수 없다. 왜, 友也者는 友其德 즉 벗을 사귄다는 것은 그의 德을 사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문장의 아름다움을 사귀는 것이 아니며, 그 논설의 매혹을 사귀는 것이 아니며, 그의 업적을 사귀는 것이 아니며 그의 명성을 사귀는 것이 아니며, 그의 작위를 사귀는 것이 아니라 그의 德을 사귀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 시대를 논하고 그의 처신을 논하는 것이다. 이것이 尙友論이다. 맹자의 식견이 위대하지 않은가.
하위직에 있는 사람으로서 임금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인민을 얻어서 다스릴 수가 없다. 임금에게 신임을 얻는 데는 道가 있다. 朋友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임금의 신임을 얻을 수 없다. 朋友에게 신임을 얻는 데 道가 있다. 부모에게 불순하면 朋友에게 신임을 얻을 수가 없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데 道가 있다. 내면의 성찰이 不誠이면 부모에게 불순하는 것이다. - 『중용』 제19장 -
朋友가 공부 잘하는 것도 미덥고, 운동 잘하는 것도 미덥고, 잘생긴 것도 미덥지만, 朋友에게 가장 미더운 부분은 그가 그의 부모에게 효도 잘하는 것을 볼 때이다.
공자의 朋友가 죽어 장사지낼 사람이 없자, 공자께서는 「내 집에 빈소를 마련하라」고 하셨다. 공자께서는 朋友의 선물에 대하여, 그것이 祭肉(제육. 제사지낸 고기)이 아니면, 비록 수레라 하더라도 감사의 절을 하지 않았다. - 『논어』 「향당」 제14장 -
앞에서 子路는 朋友와 수레를 함께 공유하다가 부서져도 유감이 안 생기기는 그런 정도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수레란 요즘의 승용차로서 값나가는 물건이다. 남에게서 물건을 받으면 감사의 절을 하는 것은 예이다. 선물이 오면 반드시 고마움의 표시로 절을 하고 받는다. 그런데 朋友와의 사이에서는 아무리 값나가는 물건을 선물로 받더라도 절하고 받는 법은 아니하고 한다. 朋友 사이에는 서로 재물을 나눌 義가 있기 때문이이라고 한다. 절을 하고 받으면 받는 朋友의 마음이 무언가(상대의 부에 머리 숙이는 감정)를 끼고 있다는 것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주는 朋友를 朋友로 대하지 못하고 부자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무언가를 옆에 끼고 사귀면 안되다(不挾xx友).'
장자(章子)는 父子 사이에 責善하다가 서로 뜻이 맞지를 않았던 것이니, 責善하는 것은 朋友의 道이다. 부자 사이에 責善하는 것은 은혜를 해치는 일 중에 큰 행위이다. - 『맹자』 「이루」 하 제30장 -
子貢이 朋友 교제에 대해서 물었다. 子曰 忠告하여 善導할 것이지만, 벗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충고를 멈추는 것이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리어 辱(욕)을 보게 된다. - 『논어』 「안연」 제23장 -
子游(자유)曰 임금에게 諫을 자주하면 욕을 당하고, 벗에게 忠告를 자주하면 사이가 멀어진다. - 『논어』 「리인」 제26장 -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사귀지 말 것이며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려하지 말 것이니라. - 『논어』 「학이」 제8장 -
孔子曰 이로운 交友가 셋이며 해로운 交友 셋이니, 솔직한 사람 진실한 사람 박식한 사람과 교제하는 것은 이로운 교우이며, 慣行에 젖은 사람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 慣言(관언)에 젖은 사람과 교우하는 것은 해로운 교우니라. - 『논어』 「계씨」 제4장 -
慣行관행에 젖었다는 것은 나쁜 의미로 쓴 말이다. 관행을 빙자하여 새로워지려는 마음을 잃었다는 뜻이다.「관행에 젖었다」는 것은 便벽(편벽)에 대한 변역이다. 이는 이로운 교우 가운데 '솔직한 사람과의 교우'와 상반된다. 慣言은 慣行과 서로 대비할 수 있기에 만들어 쓴다. 「慣言에 젖었다」는 것은 본문 便녕을 번역한 것으로서, 만나기만 하면 항상 하는 말이 낡은 것을 말한다. 오늘 남에게 한 말을 며칠 후에 만나면 또 하고 하는 등 새로운 것이 없는 것은 그의 견문이라는 것이 보잘것없다는 것을 뜻함이 아니겠는가. 물론 어떤 점에서 깨달음은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이다.
三綱(삼강)은 오륜의 핵심이라고 할 君臣 父子 夫婦에서 君臣간, 父子간, 夫婦간의 자리 또는 역할 매김을 규정한 말일 것이다. 君臣의 관계를 결하게 되면 먹고살 방도를 잃게 되고, 부자의 관계를 결하게 되면 報本할 길을 잃게 되고, 夫婦의 관계를 결하게 되면 길이 살길을 잃게 되는 등, 종합하여 말하면 사람될 길을 잃게 된다. 三綱은 君臣 父子 夫婦 둘 중에 누가 주체가 될 것이냐 하는 문제에 대한 답으로 보인다. 綱은 그물의 뜻으로 쓰이는데 目과 대비하여 말하면, 그물의 뼈대 즉 틀을 이루는 굵은 줄이며, 目은 그물눈이다. 綱을 당기면 目들은 자연히 끌려온다. 그래서 綱은 綱領이란 말로 일의 중요처, 핵심 등의 뜻으로 쓰이며, 目은 條目이란 말로 綱에 딸린 일의 세세한 것을 가리킨다. 君爲臣綱(군위신강)이란 君이 臣의 綱이란 말이다. 臣은 目이 되는 셈이다. 君臣 가운데 君이 주체가 된다는 뜻일 것이다. 삼강은 오륜이라는 인륜을 상위 개념으로 하는, 인륜을 실제화하기 위한 구체화된 실천 요綱이다. 그러므로 항상 놓지 말아야 할 것은 인륜이다. 삼강은 이 인륜에 비추어 합당할 경우에만 타당하다. 군신, 부자의 강목 문제는 변함 없는 실천 요강일 것이지만, 부부의 강목문제는 서로 바뀔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君臣의 문제는 경제와 안보문제이다. 예전에는 정치적인 한 사람이 君이 되어 백성들이 먹고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고 지켜주고 유통하는 일을 하였다. 세상이 여로 모로 분화되어 경제문제도 매우 복잡하게 전개된다. 그 만큼 君臣의 관계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君臣의 관계는 확고하다. 民主, 국민이 君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권자가 君이다. 참 좋은 민주주의라면 有權者=君의 이념이 제대로 발휘되어야 한다. 有權者 民君은 수가 많고, 모두 君의 자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대리정치를 할 수뿐이 없고, 그래서 국민 대표를 뽑아 그들을 국회의원이라고 부른다. 그러하다면 국회의장이 실제적인 국민대표로서 君의 임무를 수행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문제가 꼬인다. 국회의원(의장포함)이란 사람은 당수에게 잘 보여야 하는 사람이다. 당수의 사람이다. 국회의원인 국민 대표보다는 장관(=신하)의 젯밥에 더 관심을 두게 된다. 집권당일 경우 당수는 대개는 대통령이고 그 당수가 장관을 임명한다. 당수란 비유하자면 심부름센터의 대표이다. 따라서 국회의원은 심부름센터의 임시고용인인 셈이다. 당수 휘하의 임시고용인들이 국민의 대표가 되면 국민들은 당수 휘하의 사람으로 복속된다. 국회가 당에 예속이 되고 만다. 국회는 국민의 요구에 따라 운전되는 것이 아니라 당의 욕구대로 운전되며, 특히 당이 하나가 아닐 때는 君民도 당에 따라 분할되어 통일을 바랄 수가 없는 상태가 된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당이니 국회니 하는 것은 君臣의 관계를 바로 실현할 수 있기보다는 君爲臣綱의 의미를 혼란케 하고 있다. 오늘날의 민주제도가 전기회로라고 한다면 전원을 넣자마자 퍽 소리가 날 정도로 회로가 바르지 않고 엉성하다.
경제적으로는 나를 먹여 살리는 사람이 君이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에서는 소비자가 君이다. 생산자가, 먹을 것을 생산하는 경우라도 같다. 금나와라 뚝딱 하는 식으로 완전히 독자적으로 먹을 것을 생산하여 공짜로 먹여 살린다면 그런 경우 생산자는 왕일 것이다. 소비자가 君이다. 소비가 있어야 생산이 있다. 생산자들 가운데는 경영자가 있고 기술자도 있다. 노동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크건 작건 광의의 기술자들이다. 경영자의 일이란 기술자가 기술자이게 하는 것이다. 기술자를 보존(保存)하는 일이다. 기술자들이 각자의 집에서 망치질을 천번 만번한다 해도 먹을 것이 입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경영자 밑에서 망치질을 하면 봉급이 생겨 먹고 살 수 있다. 경영자가 君이고 경영자가 綱이다. 노동자 기술자들이 자본 등 생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하고 단지 운전수를 구하는 정도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런 경우라면 운전사는 경영기술자로서 비유하면 총리, 정승과 같은 인물이니 그가 하는 경영은 君으로서의 경영과 같지를 않다. 현실에 이렇게 하는 곳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되면 노동자가 비로소 君이 되는 것이다.
父子 사이에는 아버지가 축이다. 더욱이 오늘날의 부모는 대개가 유권자로서 君民, 民君이기도 하다.
남편은 綱이며 아내는 目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속해있는 사람이다. 三綱은 각기 두 사람간의 규범으로 알건 모르건 이 규범이 지금까지 사회에 흐르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 규범 제3강은 위의 두 綱과는 좀 다르다. 綱目을 적용하면, 하나의 綱에 다수의 目(그물눈)이 가능하다. 하나의 君에 여러 신하, 한 부모에 여러 자녀. 그런데 부부사이에는 이런 강목의 관계가 미묘하다. 중전의 자리를 차지한 여자 아내가 다른 目을 인정하기 어렵고, 나아가 여자들의 힘이 예전과 달리 영역을 가리지 않고 강하게 작용하는 판에 여자인 아내가 目임을 부정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부부간의 강목문제는 오늘날 혼란스럽다. 다만 예전의 夫爲婦綱이 면면히 작용하기는 한다. 그래도 아직은 남편을 가장으로 내세우고 있으니까. 그런 가운데도 여자의 권리 신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夫爲婦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호주제를 배척하고 부모의 성을 합하여 자녀의 성을 만들기를 주장하는 판에 綱目 운운하는 말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군신, 부자의 관계처럼 부부의 관계도 강목의 규범이 있어야 한다. 강목의 규범 없이 둘 다 綱이 되고 目이 되는 기술이 있으면 그렇게 하면 그게 규범이 될 것이고, 또 남편이 目이 되고 아내가 綱이 되게 하는 힘과 상황을 아내들이 얻고 만들어 낼 수 있으면 그게 규범이 될 수 있고, 그 밖의 어떤 조화를 유지할 새로운 방법이 있으면 그게 새로운 규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제3강 夫爲婦綱은 오늘날 혼란기, 또는 어떤 규범으로 넘어가는 과도에 있다고 본다.
영원한 숙제이다. 그러나 지금 한 마디 할 수 있는 것은 "차별할 것 차별하고(바르게 차별하고), 평등하게 할 것 평등하게 하자. 군신차별 당연하고, 부자차별 당연하다, 남녀 차별 당연하다. 차별을 행하되, 평등의 이상을 잊지 말고, 평등을 외치되 현실을 외면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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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에 관한 글 보기 http://www.ethak.com/frame6shin.htm [지어지선]에 과한 글 보기 http://www.ethak.com/frame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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