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

 

1.修身의 그림 그리기


무엇이 물에 뛰어들면 퐁당 하고, 또 무엇이 물에 뛰어들면 첨벙 꼬르륵 한다는 우스개가 있다.

물은 언제나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이런 우스개가 성립할 수 있다. 첨벙할 데에서 퐁당 하는 등 한다면 이런 우스개가 생길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이와 같지 않아, 조약돌에 첨벙하기도 하고, 바위에 퐁당하기도 한다. 퐁당 할 데에 퐁당하고 첨벙할 할 데에 첨벙하지를 못하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켜, '身이 修하지 않다', '身不修(신불수)'라고 표현한다. 반대로 첨벙할 일에 첨벙하고 퐁당 할 일에 퐁당 한다면 '身修(신수)'라고 표현한다. 身修의 상태를 이루려고 하는 노력이 修身이다.

조약돌에 첨벙하였다면 지나친 반응이고, 바위에 퐁당 하였다면 모자란 반응이다. 지나친 반응을 過()라 하고 모자라는 반응을 不及(불급)이라고 한다. 따라서 身修라는 것은 마음의 반응(표현)에 過不及(과불급)이 없는 경지이고, 修身이라는 것은 마음의 반응을 過不及이 없도록 하는 공부의 명칭이다.

過不及이 없는 경지를 中이라고 한다. 修身은 이러한 中을 잡는 공부의 명칭이다. 修身은 執中인 것이다. 요임금의 允執厥中(윤집궐중. 진실로 中을 잡아라. 논어 '堯曰요왈' )의 구체적인 모습이 수신에서 잘 드러난다.

 

2. 다른 조목과의 관계


2.1. 致知와 修身

대학의 내용에는 知의 영역과 行의 영역이 있을 뿐이다. 치지는 知의 영역이고, 수신은 行의 영역이다.

 

2.2. 성의와 수신

수신은 誠意의 한 과목이다.

 

2.3.正心과 修身은 體와 用의 관계

물결에 대하여 물은 體가 된다. 물결은 用이다. 물결이라는 것은 물의 작用이며 물결을 일으키는 물은 물결의 본體이다. 正心의 心은 물에 해당하는 것으로 마음의 본體이며, 修身의 身은 내용상 情으로서 마음결이므로 心 본體의 작用이다. 이 때문에 정심과 修身을 體用관계로 파악한다.

體用이라는 용어는, 하나인데 이름이 둘이거나, 하나인데 모습이 둘인 것을 설명하는 데 적절한 용어이다. 體와 用은 하나이다. 필요가 있어서 구분(distinction)을 할 뿐이지 분리(non-separate)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물결 역시 물인 것이나 같은 이치이다. 물결을 칼로 잘라봐야 역시 물이다. 그러나 물결과 물(결의 바탕)을 구분은 할 수 있기 때문에 물이라는 이름이 있고 물결이라는 이름이 있다.

나무

때로는 本末과 體用은 서로 비슷한 말이다. 서로 바꾸어 써도 괜찮을 때가 있다. 本末은 나무의 가지(지상부)와 뿌리(지하부)를 표현한 말이다. 따라서 本末을 이야기할 경우 나무라는 전체가 있고 그 전체의 부분으로서 뿌리와 가지를 두고 말해야 한다. 전체가 있고 그 전체를 本과 末로 나누거나(separate) 구분(distinguish)할 수 있을 때 본말을 적용할 수 있다. 이 경우 구분(distinguish)하는 정도의 本末적용이라면 體用으로 대치해도 문제 없다. 本末은 體用과 비슷한 말이기는 하지만 體用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本末은 전체에 대한 생각(한 그루의 나무라는 전체의 생각) 속에서 가능한 것 같고(本은 末이 아니다), 體用은 體를 말하든 用을 말하든 그 자체가 전체로서 둘이 아니다(體와 用은 둘이 아니다).

2.4. 수신은 원론 5조목의 대표어로서 명명덕과 동의어

經에,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결같이 修身을 本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주자는, '격물~정심까지는 修身하기 위한 조목들이며 제가 치국 평천하는 修身을 들어서 (家 國 天下에)가져다 놓은 것뿐이라고 하였다.

또한, 모든 것은 執中으로 향해 있다. 유가 초기의 주문이 允執厥中(윤집궐중)이고(논어 요왈), 거기에 인심도심(인심도심은 명명덕의 명덕이다)의 精一(정일. 정일은 명명덕의 明이다)이 추가되었고(서경 우서 대우모), 그것은 대학에서 지어지선이라는 이념 강령이 되었는데, 그 속(내용)은 다름이 아닌 修身인 것이다.

修身은 명명덕의 한 조목이면서 명명덕(즉 대학)을 대신해 쓸 수 있는 조목들(격물과 성의) 중 하나이다.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고 할 경우, 수신은 명명덕의 조목들을 대표하며, 명명덕과 동의어이다.

 

 

 

 

3.용어


修라는 동사의 목적어 身은 내용상 情이다. 情(정)은 마음에 일어난 물결 즉 파동이다. 일상에서 쓰는 마음은 대개 마음의 用에 해당하는, 情이다. 먹고 싶은 마음, 보고 싶은 마음 등등 실제하는 마음은 다 마음의 파동인 情이다. 일상에서 쓰는 마음이나 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쓰는 마음이나 쓰임에 따라 마음의 명칭이 다양하다. 사람의 한 마음은 보는 관점에 따라, 이름을 붙이는 기준에 따라 이름이 달라진다. 부모를 상대로 하여 내 마음에 발하는 마음을 孝, 孝心이라고 한다. 자식에 대하여 내 마음에 발하는 마음을 慈라고 한다.

아래 표를 살펴 보기 바란다.

 

분류기준

心의 用의 명칭

비고

파동(波動)

情(마음결)

마음(), 즉 心의 用(츨렁임)을 총칭한 개념이다.

마음은 파동(물결).

氣의 파동이므로 善(情과) 不善(한 情)의 구분이 있으나,

아래 소개하는 여러 마음을 통칭할 경우 善일변으로 쓴다(불선의 개념을 배재하고 쓴다).

 

예1) '孝는 情이다',  또는 '孝라는 情'

예2) '대학은 情을 다듬는 학이다'

예3) '명덕은 情이다'

이 때의 情은 善일변의 개념으로서 명덕과 동의어이다.

파형(波形)

七情

(희노애락애오욕)

빛의 일곱 색과 같음.

七을 생략하고 情이라고 표현할 경우 수신의 身에 해당하며

知와 상대하는 개념으로 쓴다. 이 경우 역시 善일변이다.

원리

(所以發者)

四端

측은-仁

마음을 發하게 하는 원인자인

仁義禮知와 짝을 맞춤으로써

 

心의 善함을 잘 보게 하였고

仁義禮知라는 性(이 善임)을 인식하는 단서로 삼을 수 있게 하였다.

수오-義

사양-禮

시비-知

감응처

(格하는 物이 무엇인가)

孝(부모)

慈(자식)

 

弟(형제 붕우 장유)

 

親(부모)

仁(부모외의 사람)

愛(人외의 物)

愛가 꼭 人과 상대한 物에만 쓰는 情은 아니지만,

親親 仁民 愛物의 용례에서

愛가 親과 仁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등급이 낮게 쓰였기 이렇게 따로 모았다.

敬(어른)

 

色(남여)

 

人心(物의 末)

 

道心(物의 本)

 

속성

明德(光明성)

마음은 본디 밝은 것이라는 깨달음

忠, 信(진실성)

본디 진실이라는 깨달음

恕(向物성)

외물을 향하여 나아가는 특성

峻德(위대성)

본디 위대한 것이라는 깨달음

意, 志(주재성)

이 마음의 경영자적 특성

率性여부

道心(率性)

率性之謂道.

明德이 곧 道心이므로 위에 있는 모든 情이 다 도심이다.

대학은 솔성의 도심을 밝히는 학이다.

 

 

이 표의 마음은 물결(파동)에 해당하고, 정심의 心은 물(水)이다. 물결이 물이듯이 마음결 역시 마음이다.

-情

마음에 인 파동 전체를 한 마디로 부르면 情이다. 마음의 用을 한 마디로 부르면 情인 것이다. 마음은 파동이라는 한에서는 다 情인 것이다.

-七情

마음의 파동 情을 파형에 따라 구분하면 七情이 된다.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일곱 개의 가시광선으로 변하는 것이나 같을 것이다.

-四端

情이라는 마음의 파동을 일으키는 원인자와 情을 짝지은 표현이다. 일상에서 '이런 마음은 선한 마음'이라고 통하는 네 개의 마음을 들어 '이런 마음은 이런 원인자를 지니고 있다'고 그 원인자와 짝을 맞춘 것이 사단이다. 이러한 짝 맞추기는 까닭이 있는데 性의 善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런 마음(파동)이 선하다면 이런 마음을 일으키는 파동의 원인자 역시 선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사단의 분류는 性善을 인식하기 위하여 최적화한 분류이다.

이외, 감응처, 즉 어디에 마음이 감응하였느냐에 따라서 여러 이름이 생기기도 하고, 마음 본래의 속성을 기준으로 명칭이 생기기도 한다. 마음의 속성이라는 것은,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생각한 결과 깨달은 선한 속성들이다. 明, 峻 등은 밝고 위대하다는 깨달음에서 온 명칭이다.

- 사단과 칠정

사단과 칠정은 서로 다른 情이 아니고 하나의 情이다. 사단이라는 파동의 원인자(所以發者소이발자)도 인의예지라는 性이고, 칠정의 원인자(所以發者소이발자)도 인의예지라는 性이다. 뿐만 아니라 칠정도 氣의 發動, 파동이며 사단도 역시 氣의 파동이다. 사단이나 칠정이나 다 하나의 마음이지만 이름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하나의 마음이기 때문에), 사단과 칠정은, 두 개의 무엇인 것처럼 상대하여 취급하면 안된다. 희노애락애오욕이라는 칠정은 단지 파동의 모양 즉 파형을 보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므로 七情의 善不善을 논한다면 마음의 善不善을 논하는 차원에서 해야지, 사단과 상대하여 사단은 선한 것으로 칠정은 불선한 것으로 몰아가면 안된다. 칠정은 그저 마음의 파동일 뿐이다. 사단이나 칠정이나 한 마음 한 파동이다. 사단은 情을 그 원인자와 연결하여 분류한 명칭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분류하면 性의 善함이 잘 보인다.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았을 때, ‘아! 저걸 어쩌나!’하는 마음결(情)이 이는데 여기에는 놀람과 두려움과 애긍(愛애. 哀애. 惻隱之心측은지심)과 불행을 싫어하는 마음(惡오. 羞惡之心수오지심)과 누구의 과실로 이렇게 된 것을 함께 보았다면 그렇게 만든 사람 또는 物에 대한 분노(怒노. 羞惡之心수오지심), 빨리 구해야 한다는 마음(欲욕)과 그 판단(是非之心시비지심) 등이 순간적으로 하나가 되어 나타난다.  사단 외에 칠정 없고 칠정 외에 사단은 없는 것이다.

율곡은 칠정과 사단을 전체와 부분으로 본다. 칠정 가운데 선한 부분이 사단이라는 말일 것이다. 전체와 부분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칠정을 그 원리에 배당한 명칭이 사단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人情의 선한 모습이 잘 드러나며, 性이 善임을 잘 볼 수 있다.

 

-情의 善함과 不善, 그리고 修身

情이라는 파동의 원인자 性에 근거하면 사람의 情은 善하다. 근원적으로 善하다. 칠정 역시 당연히 그러하다. 칠정의 발동원인자(所以發者소이발자) 性이 理로서 善이기 때문이다. 반면, 파동에 근거하여 말하면 모든 情은 善하기도 하고 不善하기도 하다. 사단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렇게 볼 때, 사단이 善하다고 하는 것은 파동의 원인자(所以發者소이발자)인 性에 근거하여 말하는 것으로서 氣의 발동(이 가져올 수도 있는 불선)를 떠나서 善 일변으로 말하는 경우이다.  情이라는 것이 氣의 발동인 것이며(氣의 발동에는 선불선이 있고), 사단 역시 情으로서 氣의 발동이므로 사단 역시 실제로는 불선의 경우가 있다. 불선의 내용은 過하거나 모자람(不及)이다. 이것은, 발동하는 모든 기운이 지닌 病이다. 만약 이러하지 않고, 사단이라는 情이 하는 대로 행하기만 하면 곧 中에, 상황에 딱딱 합치하여 문제가 없다면 修身은 필요 없게 된다. 왜냐하면 修身은 情無不中의 공부이기 때문이다. 사단이 修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것이 情이기 때문이다. 사단 修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수신의 대상이 곧 사단이다. 칠정 외에 사단 없고 사단 외에 칠정 없다고 하여 칠정이나 사단이나 다 하나의 情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렇게 주장할 경우 칠정 역시 선일변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明의 목적어 즉 修의 목적어가 원론적으로 다 善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태학은 불선한 것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여기서 선일변이라고 하는 것은 원론적으로 그러하다. 원론적으로는 선한 것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불선의 경우가 생기기 때문에 밝히거나(明明德) 다듬거나(修身), 알차게 하거나(誠意) 하는 노력의 필요가 생겨나는 것이다.


- 發과 生(발, 생)

마음의 물결이 인다 일렁인다는 표현을 하였는데 이는 理氣(리기)를 다루는 차원의 표현으로는 發이다. 마음에서 情이 發한다고 표현한다. 일상에서는 發과 生을 합하여 발생이라고 쓰지만 發과 生은 구분해서 쓴다. 氣는 發과, 質()에 관계한 것은 生과 짝한다. 熱은 氣(熱氣열기)이다. 따라서 發熱(발열)이라고 표현한다. 氣發理乘(기발리승)의 경우도 發을 生으로 바꾸면 안되는 경우이다. 發은 動, 表, 出의 뜻이다. 發表 發出 發動.

 

4.情이 적중하지 않는 까닭


正心의 경우는 心의 관성이 발동을 주로 하기 때문에 객정의 망동이 문제이다. 修身의 경우에는 발하는 情의 형평(대저울이 무게의 중심을 찾아 저울대가 평행한 상태. 이것이 중용, 과불급이 없는 상태)이 문제이다. 修身의 주제는 情無不中(정무불중. 情이 상황에 딱 들어 맞음), 中庸(중용), 無過不及, 時中이다.

우선 객정이 망동하는 상황에서는 主情이 제 모습을 얻을 수 없을 것이고, 객정의 망동은 없다고 하더라도 情을 다루는 훈련의 부족(知지와 行행의 훈련부족)으로 과불급의 탈이 생기고, 또 훈련이 잘 되었다 하더라도 사의가 발동하면(이 사심의 발동도 엄밀히 말하면 객정의 망동임), 분노할 일이 있어도 묵묵하게 되고, 기뻐할 일에도 기쁨을 표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과불급의 탈의 근본은 氣의 제한성에 있다. 氣의 제한이라고 함은 氣의 淸濁(청탁)을 말한다. 탁하고 순수하지 못한 기질을 타고나면, 맑고 순수한 기운을 타고난 사람보다 과불급의 탈과 객정이 망동하는 고통이 클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집주에서는 氣質所拘(기질소구. 기질에 구속당함)라고 한다. 선천적으로 대개의 사람들은 기질적인 요인으로 객정의 망동(心不正), 주정의 과불급(身不修)의 탈을 지니게 된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마음 역시 망동과 과불급의 탈이 생기게 하는 기질적 요인이다.

이러한 기질적 요인에 사욕이라는 것이 한 몫 자리하게 되면 객정의 망동, 주정의 과불급은 날개를 달게 된다. 이러한 사욕의 요인을 집주에서는 私欲所蔽(사욕소폐. 사욕의 그늘짐, 덮힘, 가려짐)라고 표현한다.

 

5. 중용의 正心 修身


중용은 태학과 짝하는 책이라고들 한다. 태학을 한 조목으로 요약하면 誠意(성의)라고 한다. 중용의 誠에 대하여 誠을 타동사화하여 誠意라고 하면 誠을 실현하는 공부가 된다. 正心修身과 관련한 중용의 부분을 살펴본다.

 

5.1.未發과 已發(미발 이발)

未發이란 아직 발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已發이란 이미 發()하였다는 뜻이다. 發이라는 동사의 주어는 心이다. 未發은 正心과 짝이 되고, 已發은 修身과 짝이 된다. 正心은 마음의 體를 바르게 하는 일로서 그 내용은 마음의 본體에 客情의 妄動을 제거하여 거울처럼 맑고 고요하고 그윽하게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正心은 未發시의 마음(이것이 體로서의 마음이다)을 닦는 일이다. 修身은 情無不中이므로(情을 대상으로 하므로), 修身은 已發의 마음(用으로서의 마음이다)을 닦는 일이다.

 

5.2.中과 和(중화)

중용에 이르기를,

‘희노애락이란 情이 未發인 상태를 中이라 하고, 發하여(已發) 모두 절도(상황)에 딱 들어맞는 것을 和라 한다. 中이라는 것은 천하의 大本(대본)이며, 和라는 것은 천하의 達道(달도)이다. 中과 和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 자리를 얻으며, 만물이 저마다의 삶을 얻으리라(제1장)’

고 하였다. 거창한 말이다. 中和가 이 땅의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로 보인다. 中이라는 것은 태학의 心正(심정)의 상태이다. 마음에 객정의 망동함이 없이 고요하고 그윽한 상태이다. 和라는 것은 身修(신수)의 상태이다. 情이 상황에 딱 들어맞는 경지(情無不中)이다. ‘중과 화를 이루면 하늘과 땅이 제 자리를 얻으며’에서 ‘중화를 이룬다는 원문은 致中和(치중화)이다. 致는 至의 타동사로서 아직 아닌 것을 되게 하는 행위이다. 致中和를 致中과 致和로 나누어 보면 致中은 태학의 正心 공부이고, 致和는 태학의 修身 공부이다. 中의 상태는 마음이 사물에 감응하기 전의 모습을 가정하고 그린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응물(應物) 전의 상태가 있기도 하겠지만 비록 응물 중에 있더라도 역시 客情의 妄動이 없는 상태라면 未發의 中은 여전히 찬연히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6.情과 物(有物有情유물유정 : 그 物에 그 情)


修身이란 情을 다듬는 일이다(情無不中). 따라서 情은 修身의 재료이다. 情이 있어야 修身이 가능한 것이다. 다듬을 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物은 어떤 다른 物에 감응을 하면 소리가 나기도 하고 빛이 나기도 하고 열이 나기도 하고 모양이 변하기도 한다. 수면은 가랑잎, 조약돌 등에 접촉을 하여 접촉한 物(의 모양과 힘)에 상응하는 물결을 일으킨다. 사람의 마음이라고 무언가 발한다는 것은 다르지 않다. 나 아닌 무엇이 내 마음에 던져질 때 내 마음엔 마음결, 情이 이다.


6.1.物我(물아)

이  경우 物은 나 아닌 모든 것이다. 物 없이 情 없고(無物無情무물무정), 情 없이 修身 없다.

 

6.2.人物(인물)

人이라는 글자를 物과 상대케 하면 그 物은 사람을 제외한 모든 것을 가리킨다. 情은 物에 닿았을 때도 발하고, 人에 닿았을 때도 발한다. 그런데 이 둘에 닿아서 발한 情의 가치는 人에 대하여 발한 情이 가치가 있다. 人에 대하여 발한 情을 닦으면 그 행위가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일 수 있다. 고양이 사랑하는 情을 다듬는 것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人에 대하여 발한 情은 가치가 있다.

 

齊宣王(제선왕): 덕이 어떠해야 왕천하할 수 있겠습니까.

맹자: 백성들을 사랑으로 보살핀다면 왕천하하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齊宣王: 과인 같은 사람도 백성을 사랑으로 보살필 수 있겠습니까.

맹자: 물론입니다.

齊宣王: 어떻게 그것을 압니까.

맹자: 胡흘(호흘)에게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왕께서 堂上(당상)에 앉아 계셨고 그 때 소를 끌고 堂下(당하)를 지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소는 왜 끌고 가는 거냐」

    「흔鍾(흔종)하려고 그럽니다.」

    「놓아주어라. 겁에 질려 사지로 가는 것을 차마 못 보겠다.」

    「그렇다면 흔鍾의 예를 하지 말까요.」

    「어찌 안 할 수야 있겠느냐. 염소로 바꾸어 하면 되지 않겠느냐.」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齊宣王: 그렇소 만.

맹자 : 이런 마음이라면 왕천하하실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왕이 구두쇠라고 생각하겠지만, 臣은 왕의 不忍之心(불인지심)을 진실로 압니다.

齊宣王: 그건 사실입니다. 백성들은 나를 구두쇠라고 합니다만 齊나라가 비록 작기로 내 어찌 소 한 마리를 아끼겠습니까. 말씀하신 바와 같이 죄없이 겁에 질려 사지로 가는 모습을 차마 못 보겠기에 염소로 바꾸라고 하였습니다.

맹자 : 백성들의 말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작은 것과 큰 것을 바꾸셨으니 백성들이 어찌 왕의 내심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이런 것입니다. 왕께서 죄없이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측은히 여기셨다면 염소인들 아니 그러하셨겠습니까.

齊宣王: (빙그레 웃으며) 아하. 그거 참 무슨 마음일까요. 재물이 아까워 염소로 바꾸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백성들이 나를 구두쇠라고 하는 것도 당연하겠습니다.

맹자: 백성들의 말에 마음 쓰실 것은 없습니다. 왕께서 하신 행위는 바로 어진 마음을 닦는 기술입니다...... 나의 집 어른을 공경하여 남의 집 어른공경으로 나아가고, 나의 집 어린이를 사랑하여 남의 집 어린이 사랑으로 나아간다면, 천하는 손바닥 위에서 움직일 수 있습니다. 詩經(시경)에 이르기를, 「아내의 모범이 되어 형제의 모범이 되고, 그렇게 하여 나라를 다스린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이 마음을 들어 남에게 적용할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미루어 나아가면 四海(사해)를 사랑으로 지킬 수 있고, 은혜를 미루어 나아가지 못하면 처자식도 지킬 수 없는 법입니다. 옛사람들이 크게 뛰어났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가 할 일을 잘 미루어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왕의 은혜는 禽獸(금수)에게는 족히 미치면서도 정치하는 功()이 백성에게 이르지 않는 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무게를 단 연후에야 경중을 알며, 자로 잰 연후에야 길이를 아는 법. 物치고 안 그런 것이 없겠으나, 마음이란 물건은 다른 것보다 달고 재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러니 왕께서는 왕의 마음을 잘 헤아리십시오.

        - 『맹자』 「양혜왕 下」 제7장 -


겁에 질려 사지로 끌려가는 소를 본 제선왕의 마음에는 측은한 물결이 이다. 그래서 소를 놓아주라고 한다. 이는 소와의 관계에서 발한 情을 다듬은(잘 다듬었건 못 다듬었건 상관없이) 行이다. 죄 없는 소를 보고 발한 측은한 마음과 죄 없는 백성을 보고 발한 측은한 情을 비교할 때, 情의 가치는 백성과의 관계에서 발한 情이 월등히 귀하다고 할 것이다. 백성에 대한 情은 임금으로서 修身하는 데 가장 직접적인 최고급의 재료이다. 재료가 좋으면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의 하나는 마련된 것이다. 修身 본연의 목표를 위해서는 좋은 재료의 공급처 즉 사람과의 관계가 필수이다. 소(소는 人에 대하여 物임)와의 관계에서 발한 情을 닦는 행위는 미루어 나아가야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에서 발한 情은 미루고 말고 할 것 없이 닦기만 하면 그냥 살과 피가 된다. 죄 없는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밝히면 그것이 곧 백성 한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가정을 구하는 일이 된다. 소를 살려 준 공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사람과의 情, 거기에, 닦는 까닭이 있기에 그 情이 귀하고, 그 情을 내는, 사람 사람과의 관계는 귀하다고 하는 것이다. 物中의 物은 사람이다.


6.3.사람 중의 사람들-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우

제대로 실천도 안되고, 정신적 시달림을 달고 다니며, 情을 닦는데 혼란을 주는 게 있다. 바로 겸애설이다. 길가는 사람과 부모를 똑 같이 사랑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뿐이 없는 겸애. 실현 불가능이다(인정에 어긋나고 현실의 능력에도 힘이 부친다). 그런데도 불가능인 것이지만 마음을 혼란케 한다. 그럴듯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현혹되기도 한다. 따르자니 갈등이 쌓이다.

 6.3.1.愛無差等(애무차등)

 墨翟(묵적) 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墨者(묵자)라고 부른다. 墨者들은 愛無差等(애무차등)을 주장한다고 한다. 愛無差等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는 길가는 사람이나 부모 형제 가릴 것 없이 똑같이 사랑한다는 말로 보이며, 兼愛의 다른 표현으로 보인다. 兼愛는 別愛와 대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兼은 「상호간의 친소를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라는 의미에서 同()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것으로 보인다. 墨子는 세상 혼란의 원인을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 不相愛(불상애)에서 찾는다. 따라서 혼란의 해결책은 兼相愛(겸상애), 兼愛 「똑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 뜻은 훌륭하지 않다고 할 수 없겠지만, 논리는 공허하다. 愛는 空이 아니라 實이다. 빈손 빈 몸으로는 愛를 실천, 표현할 수가 없다. 물질(몸을 포함하여)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無物不成(무물불성) 또는 無物不誠(무물불성)이다. 내 부모 형제 처자에게 받칠 물질을 위해서 평생 노력해도 남음이 없는 것이 대개의 인생인데, 어떻게 남의 부모형제에게 똑같이 물질을 받칠 수 있을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몸뚱이와 물질-재화의 제약 때문에, 兼愛를 할 능력이 사람에게는 없다.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兼愛를 주창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兼惡(겸오. 똑같이 미워하기) 또는 不愛를 조장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말로 제사를 지내기로 한다면 온 동네가 다 먹고도 남을 것이라는 말이 있다.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면 온 천하도 사랑하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어찌 사랑이 되겠는가. 사랑한다고 하면 物이 없을 수 없다. 바칠 몸은 하나인데, 바칠 데는 억만인 데서 순서가 생기는 것이다. 결정할 것이 생기는 것이다. 먼저할 데가 있고 나중할 데가 있는 것이다(知所先後則近道矣지소선후즉근도의. 경1장). 「먼저하고 나중할 바를 알면 道에 가까우리라」. 따라서 愛無差等은 非道(비도), 즉 道 아닌 道, 道처럼 보이는 道이다.

묵자의 겸애론에 「도둑이 제 집만 사랑하고 다른 집을 사랑하지 않아서 남의 집을 털고, 제 몸만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지 않아서 남을 해쳐 자신을 이롭게 한다. 왜 그런가. 不相愛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 태학적인 차원에서 이 말을 해설해 보겠다. 도둑이 제 집 부하게 만들려고 남의 집을 터는 것과, 나쁜 놈이 저 이롭자고 남 해치는 것은 각각 제 집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제 몸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욕이며, 사욕에 사로 잡혀 마음에 인 물결, 情이 절도에 맞지 않은 경우이며, 마음에 인 물결, 情을 제대로 다듬어 내지 못한 것일 뿐이다(身不修). 묵자가 말하는 兼愛의 愛와 別愛의 愛는 글자는 같아도 내용은 다르다. 兼愛의 愛는 천리-正理정리로 한 말이고, 別愛의 愛는 사욕일 뿐이다. 사랑이 아니다

묵자의 兼愛론의 兼愛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단어로 유가에는 汎愛범애가 있다. 널리 사랑한다는 뜻이다. 사랑의 국면을 크게 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 크기는 저마다의 능력에 따라 다를 것이고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를 것이다.

 

司馬牛(사마우): (걱정하기를), 사람들은 모두 형제가 있어 우애를 나누는 데 나는 그럴 형제가 없구나.

子夏(자하): 내가 듣자하니,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렸고 부귀는 在天(재천)이라 하더라. 군자가 안으로 마음을 공경되게 하고, 밖으로 처신을 공손 되게 하여 예를 갖춘다면, 四海之內(사해지내)의 사람들이 모두 형제일텐데, 그대는 군자로서 어찌 형제 없는 것을 걱정하는가.

      - 『논어』 「안연」 제5장 -

 

四海同胞(사해동포). 이런 말을 한 子夏이지만, 자신의 부모상에서도 거뜬하던 눈이 자식의 상을 당하여서는 슬픔이 지나쳐 실명을 했다고 하는 기록으로 자하는 만세의 비웃음을 산다고 한다. 子夏가, 이웃이 자식 잃은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할 수 없을 터인데, 유독 자기의 자식을 잃고 슬픔이 과하여 실명까지 하였다. 내 자식 사랑하듯 남의 자식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것이고, 다만 내 자식 사랑을 미루어 나아가는 것이 가능할 뿐이다. 능력만큼. 물론 능력도 키워야 하겠지만. 凡愛衆이니까. 親親仁民, 仁民愛物(친친인민 인민애물 : 부모 사랑하기, 남사랑하기, 사람 아닌 것 사랑하기가 사랑의 중요도로 나열한 순서이다).


6.3.2.오륜 없이 修身 없다

 

f(부모)=孝

f(남의 부모)=敬

사람을 구체화한 표현이 오륜이며 오륜의 사람은 사람 중의 사람이다. 이 다섯 관계 가운데 결하는 것이 많을수록 인생의 행복(마음 닦는 일)에 장애가 커진다. 오륜 없이 情 없고 그 情 없이 修身 없다. 오륜을 떠나, 무슨 情을 닦을까. 

有物有情(그 物에 그 情)

無物無情(物 없이 情 없음),

물외무심(物外無心. 物 밖에서 心을 찾으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