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心

 

1.正心의 그림 그리기


머리로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지 못하면서 안다고 하면 그것은 시행될 수 없는 관념일 뿐 앎이 아니다

차 한잔을 마시는 마음은 正心의 분위기와 잘 맞는다. 차를 잔에 따랐는데 그 잔에서 차가 출렁댄다면 마실 기분이 나지 않겠다.

물은 외부의 작용을 받지 않으면 고요히 머문다(止지). 많이 들 하는 말로 明鏡止水(명경지수)가 된다. 여기에 가랑잎이 하나 떨어지면 동그란 물결을 이룬다. 正心, 마음을 바로 한다 함은 마음을 수면에 비유하여 마음을 명경지수처럼 하는 일이다. 마음에서 쓸데없이 일렁이는 물결을 제거하여 마음이 명경처럼 되게 하는 일을 가리켜 '心을 正 하게 한다', 즉 '正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된 상태를 '心이 正하다', '心正(심정)'이라고 표현한다.

물의 일렁임을 물결이라고 하고 마음의 일렁임은 情이라고 한다. 情은 마음결이다. 쓸데 없이 일렁이는 情을 客情(객정)이라고 한다. 불청객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금 일지 말아야 하는데 일어나서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것은 불청객이 와서 주인이 제대로 일을 못하게 하는 등 주인의 집분위기를 망가뜨리는 것이나 같다. 객정이 일렁이는 것을 妄動(망동)이라고 부른다. 원칙 없이 예의 분별 없이 처신하는 것을 輕擧妄動(경거망동)이라고 하는데 바로 그 망동이다. 正心은 마음에서 이러한 客情의 妄動을 제거하는 공부의 명칭이다. 불청객이 경거망동하게 되면 주인이 뭘 제대로 할 수 있지 않기 때문에 무언가를 하려는 주인이라면 반드시 마음의 불청객인 客情을 몰아 내야 하는 것이다.


2.正心은 왜 필요한가


물은 가만히 놓아두기만 하면 명경지수가 되려고 하고 그렇게 된다. 사람의 마음은 대개의 경우 가만히 둔다고 正해지지는 않는다. 어떤 경우는 가만히 둘 수도 없는 경우도 있고, 고요하려고 하면 더욱 일렁이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이 正하지 않은 것, 不正(불정)으로 인해서 애를 먹고 있다. 이 不正의 상태가 통제하기 힘든 정도에 이르면 진정제라는 약, 마약도 쓴다. 대마초도 피워야 할 것이다.

어떤 까닭이 있어 代數(대수)와 조상들의 수를 짝지어 셈해본 일이 있다. 나를 있게 한 조상들의 수는 대수마다 2의 대수의 제곱이다. 1대는 부모의 대이다. 10대선상의 조상수는 2의 10제곱인 1,024명이다. 많이 듣던 수이다. 11대선상은 2,048명, 12대는 4,096명. 엄청난 수의 조상들이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줄어들어 나중에는 아담과 이브만 남는 줄 알았는데 되레 엄청난 수로 늘어난다. 1대에서 10대까지의 조상수를 합하면 2,055명이다.

대수

1(부모대)

2

......

10

합계

조상수

2

4

......

1,024

2,055

 

이러하듯 나, 나의 마음은 10대 이내에만 치더라도 2천여명 이상의 마음이 얽혀 이루어진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다.

나, 나의 마음이라는 것은 조상들로부터 물려 받은 氣(遺體)를 뿌리로 하고 있다. 氣라는 것은 부단히 꿈틀거리는 物인데다가 그 物이 조상들의 氣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비록 지금 내가(나의 意) 고요하고자 한들 가만히 있어 주지를 않는다. 지금의 처지에서, 마음이 發動하면 안되는데도 마음은 발동한다. 절로 이렇게 되는 것이다.

이러하기에 마음의 까닭없는 발동을 제거하는 일이 대개의 경우 필연이다. 까닭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까닭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처지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正心은 대개의 사람들이 공을 들여야 할 일이 된다.

또한 나의 知와 나의 情과 나의 意가 用임에 대하여, 정심의 이 마음 心은 바탕(體)이다. 정심의 이 心(의 바탕)에서 知와 情과 意가 발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知와 情과 意는 객정에 대하여 주인이 되는 情들이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마음에 객정의 망동이 없어야 저러한 知와 情과 意가 제대로 비추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로 하는 정심이 먼저라고 할 수 있지만, 이는 형식의 논리일 뿐 실제에서는 꼭 그렇게 되어지지 않는다. 치지와 수신하고저하는 성의를 하는 중에도 정심 공부는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렇게 행해지는 정심공부가 없는 정심공부, 즉 다만 정심 공부는 도로아미타불이 되기에 알맞다. 실제의 공부에서는 둘로 금을 그어 나누면 안된다. 정심 공부는 대학공부의 體이다. 치지와 수신하고저하는 성의는 用 공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