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

 

주재(주관자)의 관점에서 태학(明明德)을 정의하면 誠意이다.

태학을 경영하는 조목이 성의이기 때문이다.

선인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중용은 誠 한 글자일 뿐이고

태학은 중용의 실천 공부(誠之성지)라고 한다.

誠之의 之를 지목하여 말하면 바로 意이다.

誠之는 誠意인 것이다.

'意를 誠하게 하다.'

意을 誠하게 한다고 함은 誠 = 意의 상태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意는 나(我)를 주재(主宰)로 파악한 표현이다.

意는 실재의 나(我)이다.

나=意는 그 온 데가 誠(天의 다른 표현)이므로

온 데를 거슬러 올라가 말하면 본디 誠한 것이나

실제는 아직 그 상태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未誠)이다.

내 안에 있는 未誠의 하늘이 意이다.

 

 1. 意


1.1. 意는 意思 意欲으로서 대학의 주재자

마음의 파동이 情이다. 파동이 아니고서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도 없는 것이고 파동이 아니고서는 마음이 할 일(마음의 일이 곧 파동)도 없을 것이고 파동이 아니고는 마음이라고 할 것도 없다. 일상에서 말하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모두 情이다. 마음의 파동인 情은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다. 意 역시 이 여러 명칭 가운데 하나이다. 여러 이름은 각기 그 이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표를 다시 보자.

분류기준

心의 用의 명칭

비고

파동(波動)

情(마음결)

마음(), 즉 心의 用(츨렁임)을 총칭한 개념이다.

마음은 파동(물결).

氣의 파동이므로 善(情과) 不善(한 情)의 구분이 있으나,

아래 소개하는 여러 마음을 통칭할 경우 善일변으로 쓴다(불선의 개념을 배재하고 쓴다).

 

예1) '孝는 情이다',  또는 '孝라는 情'

예2) '대학은 情을 다듬는 학이다'

예3) '명덕은 情이다'

이 때의 情은 善일변의 개념으로서 명덕과 동의어이다.

파형(波形)

七情

(희노애락애오욕)

빛의 일곱 색과 같음.

七을 생략하고 情이라고 표현할 경우 수신의 身에 해당하며

知와 상대하는 개념으로 쓴다. 이 경우 역시 善일변이다.

원리

(所以發者)

四端

측은-仁

마음을 發하게 하는 원인자인

仁義禮知와 짝을 맞춤으로써

 

心의 善함을 잘 보게 하였고

仁義禮知라는 性(이 善임)을 인식하는 단서로 삼을 수 있게 하였다.

수오-義

사양-禮

시비-知

감응처

(格하는 物이 무엇인가)

孝(부모)

慈(자식)

 

弟(형제 붕우 장유)

 

親(부모)

仁(부모외의 사람)

愛(人物의 物)

愛가 꼭 人과 상대한 物에만 쓰는 情은 아니지만,

親親 仁民 愛物의 용례에서

愛가 親과 仁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등급이 낮게 쓰였기 이렇게 따로 모았다.

敬(어른)

 

色(남여)

 

人心(物의 末)

 

道心(物의 本)

 

속성

明德(光明성)

마음은 본디 밝은 것이라는 깨달음

忠, 信(진실성)

본디 진실이라는 깨달음

恕(向物성)

외물을 향하여 나아가는 특성

峻德(위대성)

본디 위대한 것이라는 깨달음

意, 志(주재성)

이 마음의 경영자적 특성

率性여부

道心(率性)

率性之謂道.

明德이 곧 道心이므로 위에 있는 모든 情이 다 도심이다.

대학은 솔성의 도심을 밝히는 학이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意 또는 志는 주재라는 속성상 지어진 이름이다. 마음은 제멋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고 조종 통제하는 속성(주재자 천리然한 것)이 있다. '일신의 주재자 마음'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 마음은 정확히 표현하면 意이다. '夫志는 氣之帥也(志라는 것은 일신의 기운을 통솔하는 장수이다. 『맹자』 「공손추상」 제2장)'에서 志 역시 意이다(의지意志). 意는 意思이다. 의사는 생각이다. 생각함이 없는 주재는 사람의 차원에서는 생각할 수 없다. 주재자 天의 意는 그 자체로 誠이다. 無爲(무위)이다. 사람의 생각 意는 有爲한 天으로서, 주재자 天然(天과 비슷한)한 무엇이다. 天然이라고 하는 까닭은 未誠, 아직 天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래의 내용은 대학 전체의 내용이다. 이 내용이 모두 欲 한 글자에 달려 있는 모습이 보인다. 欲 한 글자에 대학의 조목들이 달라 붙어 있다.

意는 意思와 意欲으로서 대학의 주재자, 경영자이다.

 

古之

옛날

①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천하에서 明德을 밝히고자 하면

먼저 治國하고

②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治國하고자 하면

먼저 齊家하고

③欲齊其家者

先修其身

齊家하고자 하면

먼저 修身하고

④欲修其身者

先正其心

修身하고자 하면

먼저 正心하고

⑤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正心하고자 하면

먼저 誠意하고

⑥欲誠其意者

先致其知致知在格物

誠意하고자 하면

먼저 致知하였나니 致知는 格物에 있다

 

1.2. 意는 善意

意는 일신의 주재자로서, 그 본원은 天=誠이므로 원론적으로 善한 것이다. 일상에서 말하는 惡意 역시 意이지만 惡意는 誠의 대상이 아니다. 악의 誠하게 할 것은 없고 또 惡을 誠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악의를 버리려는 意는 善意이다. 이 意를 誠하게 하면 악의를 제거하는 것이 된다.

意는 善意로서 善일변으로 하는 말이다.

實其善(실기선)은 自明誠(자명성: 明의 노력을 통하여 誠하게 되는 것. 『중용』 제21장)에서 의 집주이다. 은 誠이고 其善 내용은 意이다.

집주 '爲善去惡之意(위선거악지의)'라고 하여 意가 善意임을 밝히고 있다. '선은 행하고 악은 제거하고자 하는 意'이므로 誠意의 意는 善意이다.

誠意의 意는 道心 즉 率性의 道心이다. 악의가 있다면 그것은 逆性(천명을 거스름)의 마음, 즉 非道心이다. 대학소위 拂人之性(불인지성: 인성에 역행함)하는 마음이다

好人之所惡 惡人之所好 是謂 拂人之性 菑必逮夫身 남이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고, 남이 좋아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인성을 역행하는 짓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재앙이 반드시 미칠 것이다. 傳 제10장

.

이런 마음은 誠과 짝이 될 수 없는 마음이다.

성의의 意는 善意이다.

 

1.3. 意는 實意(格物誠意)

意 한 글자만 써 놓으면 意는 빈(虛)그릇일 뿐이다. 意가 實意가 되려면 '무엇에 대한 意'라는 형식을 취해야 한다. 格物해야한다. 집주 爲善去惡之意(위선거악지의. 선은 행하고 악은 제거하려는 意)도 빈그릇을 實하게 하는(채우는) 시도이다. 爲善去惡之意(위선거악지의)라는 것은 원론 차원의 설명이다.

明明德 하고자 하는 意

齊家 治國 平天下하고자 하는 意

오륜 家 國 天下에 대한 意 등등 구체화될수록 빈 그릇의 내용을 채우게 된다.

爲善去惡, 齊家 治國 平天下, 오륜, 家 國 天下는 格物의 物이다.

이로 보아 誠意 역시 格物誠意로서 格物에 있음을 알 수 있다.

 

1.4. 意는 지행합일자이며 지행병진자

집주에서는 誠意를 自修의 首(수. 첫 조목)라고 하였다. 이것만 놓고는 아무 이론이 없다. 그러나 自修(스스로를 닦음)에서 格物致知가 제외되는 것이 문제이다. 격물치지는 知의 영역으로 보고, 誠意 이후의 조목들은 行으로 보아 성의를 自修의 首로본 것이다. 이렇게 취급하면, 주재자 意의 영토에서 知라는 영토를 빼버리는 셈이고, 주재자로서의 誠意를 반토막 내는 셈이 된다. 격물치지하고자 하는 意는 意가 아니냐고 물으면 답할 수가 없게 된다. 또 格物致知하고자하는 意 역시 爲善之意(위선지의: 선을 행하려는 뜻)이기도 하다.

意는 빈 그릇이다. 반드시 실제의 物로 그 내용을 채운 다음이라야 意을 誠하게 할 수가 있다.

 

致知하고자 하는 意를 誠하게 하는 경우, 그 성의는 致知가 된다. 修身하고자 하는 意를 誠하게 하는 것은 수신이다. 따라서 誠意는 行의 시작일 뿐 아니라 知의 시작이면서 知와 行 그 자체가 된다.

誠意를 대학의 시작이라고 하면 옳지만 格物致知 뒤에 나오는 自修(行)의 시작 조목이라고 하면 옳지 않다. 또 誠意를 다만 시작이라고만 하면 안된다. 誠意 자체가 格物致知와 正心修身이기 때문이다. 格物致知와 正心修身을 제외한 誠意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意는 知와 行을 합일하기도 하고 따로 취급하기도(병행하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意, 誠意는 知行合一者(지행합일자)이며 知行竝進者(지행병진자)가 된다. 誠意는 태학의 始終을 일관하는 道인 것이다. 흔한 말로 알파요 오메가이다. 태학은 誠意일 뿐이다.

 

>>>지행합일<<<

 

>>>지행병진<<<

 

어찌 하였든 대학은 知와 行을 통괄하므로 성의는 대학을 전체를 규정하는 조목이 되는 것이다.

대학은 성의일 뿐이다.   

 

2. 意의 실제이름 人心 道心


주재자 意의 모습 가운데 人心 道心이 있다.

人心은 惟危하고 道心은 惟微하다. 惟精惟一할지니 允執厥中하라(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미약하기 마련이다. 정일하게 대처할지니, 진실로 중을 다스려라.『서경』「 우서」 '대우모')」

이것이 人心 道心의 유래이다. 人心 道心은 유학의 대상이다. 人心 道心은, 빈 그릇으로서의 意에, 내용을 채운 말로서 다만 意보다 實意로 나아간 말이다.

 

- 人心 도심의 정의

人心은 物의 末에 감응한 意이다.

道心은 物의 本에 감응한 意이다.

이 정의는 여기 태학경연에 하는 정의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이러하다.

일상 음식의 차원에서 말하면,

밥이 本이고

과자는 末이다.

이 경우, '末-과자'에 감응한 마음은 人心이다.

'本-밥'에 대한 마음은 道心이다.

어린 아이들의 경우 과자의 유혹이 강하다. 人心은 위태하고 도심은 미약한 경향이다.

 

부모와 자식을 대비할 적에 일상의 원론을 적용하면,

부모는 本이고 자식은 末이다.

부모에 대한 마음은 孝라하고

자식에 대한 사랑은 慈라 하므로,

孝는 道心이 되고 慈는 人心이다.

孝는 慈에 비하여 미약한 게 탈이다.

慈는 孝에 비하여 위태한 것이 탈이다.

 

염불과 제밥을 비교할 경우 염불이 本이고 제밥은 末이다.

염불하는 마음은 道心이고,

제밥에 대한 마음은 人心이다.

제밥에 대한 마음 인심이 도심을 압도하는 것이 늘 탈이다.

 

이렇게 意를 인심도심으로 나타내면 이미 物에 감응한 것이 되므로 意가 實하게 된다. 誠意가 格物이 되는 것이다.

 

- 인심 도심과, 도심 비도심

인심을 상대어로 갖는 도심이 있고,

인심도심을 포함하면서 비도심을 상대어로 갖는 도심이 있다.

 

3. 意의 다른 이름 道心-意의 속성에 따른 명칭


여기에서 말하는 道心은,『중용』 '率性의 道'에 마음 心을 붙여서 道心이라고 이해한 것이다. 하나의 意 인심도심을 또 다른 이름 도심으로 표현하여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주자의 인심도심에 관한 글을 보면 인심도심의 모습이 정확히 보이지 않는다. 주자뿐아니라 이후 사람들의 인심도심 언급을 보면, 인심도심을 말하는 기준이 여럿이다.

人欲天理를 기준하기도 하고,

감응처(어디에 감응하였는가)를 기준으로 하기도 하고,

동기를 기준으로 하기도 하고,

중절(中節)여부(상황에 적중했는가)를 기준으로 하기도 하고,

동시에 한 자리에서 이런 기준을 혼합하기도 하는 등,

인심과 도심의 구분이 불가능하다.

인심이 변하여 도심이 되는 경우도 있다('주자의 인심도심 언급 모음' 참조).

 

- 인심도심은 유학의 주제어

 

「人心은 惟危하고 道心은 惟微하다. 惟精惟一할지니 允執厥中하라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미약하기 마련이다. 정일하게 대처할지니, 진실로 중을 다스려라.『서경』「 우서」 '대우모')」

 

이 말씀이 유학의 출발이고 끝이다. 이 말씀은 태학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인심도심의 이해가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는 태학 즉 유학의 이해가 제대로 될 수 없다.

비도심을 상대어로 갖는 도심은 率性여부에 따른 분류이다. 인심과 도심은 (率性의)도심이다.

하나의 意이지만 物의 本과 末에 감응하면 각기 도심과 인심이라 부르고,

인심도심을 본연의 속성에 따라 이해하면, 率性이 道이므로(率性之謂道솔성지위도) 意 즉 내안의 天誠으로서 반드시 率性이며 이 때문에 道心이다.

순임금의 인심도심(格物의 옷을 입은 意의 실제 명칭)은 (솔성의)道心(속성에 따른 명칭)이다. 誠意는 도심 본연을 存(회복)하는 일이다. 도심 본연의 意는 실제에 있어서 인심과 도심으로 존재한다. 본말 구분(物有本末)에 따라, 意를 도심과 인심으로 구분하여 이해하면 (솔성의)道心 본연을 存하는 구체적인 공부의 모습이 드러난다. 微(도심의 탈)와 危(인심의 병)라는 過不及(과불급)의 탈을 치료하면 되는 것 과제로 드러나는 것이다.

 

4. 誠意의 번역


誠意의 번역으로 '뜻을 알차게 하다' '생각을 알차게 하다'가 적당하다. 집주에서는, '誠은 實'로 정의한다. 實은 眞이다. 眞은 우리말 '참(滿)'으로 통하고 있다. 實은 명사로 쓰면 내용(알)이며, 동사로 쓰면 내용(알)을 채우는 것이다. '참'에 '알'을 붙여 '알참'이라고 하면 '참'보다 그림이 잘 그려지고 誠의 뜻을 담아내기에 더 알맞게 된다. 번역하여 쓰자면 '뜻을 알차게 하다'로 하면 좋겠고, 그냥 誠意로 쓰면서 '뜻을 알차게 하다'로 알아 들으면 편리할 것이다. 뜻은 意思와 意欲이다. 이 번역에 알맞는 그림은, 밤(먹는 밤)이 여물어 알이 차면 딱 벌어지는 바로 그 모습다.

 

5. 성의의 비유 그림


이제까지 성의에 대하여 견지하고 있는 생각은 조목의 하나이다. 격물치지 다음에 오는 조목이었다. 그러나 성의는 그러한 일개 조목만이 아니다. 대학의 한 부품일수만은 없다. 다만 그 진실성만을 생각하면 하나의 조목이다. 그러나 그 주재를 생각하면 대학의 천자에 해당하는 조목이다. 천자는 방기를 다스리는 면에서는 여느 제후 君들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주재, 즉 사해를 주재하는 면에서는 여느 제후와 같지를 않다. 誠意가 바로 이러한 조목이다. 이러하므로 이 태학론에서는 성의를 천자적 조목이라고 설명한다.

하나! 둘! 셋! 넷! 군인들이 열을 지어 발을 맞추어 행진하고 있다. 열 밖으로 나와 지휘하는 자는 보이지 않는다. 대열 안에 자신도 행진하면서 대열을 지휘하는 자가 있는 것이다.

성의가 이와 같다.

 

 

6. 誠, 誠之, 誠意


誠에 관한 『중용』과 『맹자』의 구절과 집주

본문

집주

夫微之顯

誠之不可揜如此夫

(『중용』 제16장)

誠者眞實無妄之謂

 

誠者 天之道

誠之者人之道也

(『중용』 제20장)

誠者는 眞實無妄之謂이니 天理之本然也

誠之者는 未能眞實無妄而欲其眞實無妄之謂니 人事之當然也

誠者天之道

思誠者人之道也

(「離婁上」제12장)

誠者는 理之在我者로 皆實而無僞니 天道之本然也

思誠者는 欲此理之在我者로 皆實而無僞니 人道之當然也

誠身有道

不明乎善 不誠其身矣

(「離婁上」제12장)

誠은 實也

 

 

 

6.1. 집주 誠 정의의 감상

誠者는 眞實無妄(성은 진실무망)인데 天理之本然이다  

②誠者는 理之在我者皆實而無僞天道之本然이다(성은, 내안의 理로서 전적으로 알차서 거짓이 없는 경지이니 천도의 본연이다)  

誠은 實也(성은 알차게 하는 것이다)

 

사서에서 誠의 주석은 위의 세 가지

은 『중용』에서의 집주이다. 원론 차원에서의 정의로 보인다.

『맹자』 誠身有道(성신유도: 자신을 알차게 하는 데는 정도가 있으니)에서의 집주이다. 일용지간에서 쓰이는 생활 공부로서의 誠의 정의로 보인다.

는 『맹자』에 그대로 나타나는, 『중용』의 같은 본문에 대한 정의이다. 『중용』에서 보다는 한 단계 땅으로 끌어 내려서 정의함으로써 양자()를 이어주자는 의도가 있는 정의로 보인다.

 

『맹자』와 『중용』에서, 원문은 똑 같이 天道인데,

『중용』에서는 '天理본연'으로 정의하였고

『맹자』에서는 '天道본연'으로 하였다.

道나 理나 같은 物이지만 道는 理의 구체화된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중용』에서 眞實無妄이던 것이 『맹자』에서는 理之在我者(내게 있는 천리)를 더하였고, 皆實而無僞라고 하여 로 바꾸었다. 분명 한 단계내려 현실에 적용하려는 의도가 있다. 眞實無妄의 해석은 논리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이 가능하다.

진실하여서 無妄이라는 것은 논리적 해석이다.

진실즉무망(진실은 곧 무망이다)'은 실제적 해석이다.

誠은 無妄이다. 無妄이 진실이다. 이것을 '천리의 본연함', 또는 '본연의 천리'라고 하였으니(天理之本然), 誠은 천理이다.

한 단계 낮춘 정의(誠은 理之在我者皆實而無僞)에 따르면, 誠은 내게 있는 천리이다. 내게 있는 본연의 천리. 天理 본연, 본연의 天理에서 理()대신 道를 써서 '천道의 본연', 또는 '본연의 천道(天道之本然)'라고 할 수 있는 것은. 道즉理이기 때문이다.

 

'誠은 實이다()'는, 誠身有道(성신유도: 자신을 알차게 하는 데는 정도가 있으니)에서의 誠의 설명이다. 實은 속을 알차게 하는 것이다. 동사로 쓰였다. 誠(본연의 천리와 본연의 천도)은 알차서 빈 데가 없게 하는 행위와 주체와 대상의 소이연자(그 때문에 알차서 빈데가 없게 할 수 있는 까닭, 근원)이다. 알차게 하는 행위와 주체와 대상은 다 하나의 意이다.

身은 自身이다. 自身은 意이다. 誠身 즉 誠이라는 동사의 주체도 자신 즉 意이다. 따라서 자신을 誠하게 한다고 함(誠身)은 意가 意를 誠하게 하는 것이다. 이로 보아 意는 일신의 주재자이다. 意가 주재자인 것은 意의 본원이 주재자 天理이기 때문이다. 또 意가 意를 誠하게 할 수 있는 까닭은 意의 본원인 주재자 천리가 誠으로서 意가 본시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誠身은 意 본연을 회복하는 일이다. 意의 주재를 천리 본연으로 회복하는 일이다.

 

6.2. 誠은 천리의 本然(誠卽理성즉리)

誠은 다름 아닌 理를 나타내는 여러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이름 가운데 天이 대표적인 명칭이며, 命 性 道 善 眞 美 등이 있다.

理는 상식적인 견지에서 無라는 설명이 가장 편리한 설명이다. 설명하기는 편리하지만 알아듣는 처지에서는 역시 알아 듣기 쉽지 않다. 도리어, 자칫 다른 길로 빠지게 되는 위험도 있다. 그러므로 이것(理)을 눈에 보이거나 사람이 느낄 수 있는 實한 무엇(본래 理가 그런 것)으로 전환할 필요가 생긴다. 天이 바로 그것이다.

天이라고 하고 보니 理의 본연한 모습을 오히려 잃어버리기도 한다. 理를, 사람 같은 하느님으로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고 빌고 한다. 이 때문에 天卽理(천즉리: 天은 理이다)라는 설명이 필요하게 된다('『논어』 「 팔일」 13. 獲罪於天無所禱也-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데가 없다'의 주)。

性이라고 하니 못알아 듣는다. 그것이 天理인 줄을 모르고  '악하다'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니다' '길들이는대로 된다' 하는 등등의 주장이 등장한다(『맹자』 「고자」편에서 고자와 어떤 이, 그리고 후대에 性을 논하는 사람들).

이에 맹자가 性善(性卽善: 性은 곧 善)이라고 하니, 순자는 이를 못알아듣고 성악이라고 한다(『순자』 「성악」편). 이에 대하여 정자는 '性卽理(성즉리)'라는 명쾌한 정의를 내린다. 제자리로 돌려 놓은 것이다.

誠도 역시 배경은 같을 것이다. 眞理(진리)라는 낱말은, '眞은 理이다'라는 정의를 품고 이루어진 낱말이다. 眞實(진실)은, '眞은 實'이라는 정의를 포함한 낱말이다. '참(滿만) 眞'이라고 읽고 있는 것이나 '眞은 實'이나 같은 말이다. 誠은 진실(眞實無妄)이다. 따라서 誠은 '진실' '진리'로서 誠理, 誠즉理이다. 誠은 천리로서 理를 표현하는 또 하나의 명칭인이다.

理가 無가 아니라 實한 무엇임을 깨닫는 하나의 그림이다.

 

誠은 하늘에 배당한 용어이다. 사람이 천지 간에 살며 하늘을 형용하고 배우고자하는 말로서 誠만한 것이 없나 보다. 이와 같은 것으로 그리스도교인들이 하는 말이 있다. '하느님이 곧 진리', '하느님은 사랑'이라든가 하는 것이 이런 것이다. 진리니 사랑이니 하는 것은 理이다. 따라서 하느님도 理라는 표현이다.

이 理는 공허한 것이 아니고 그 반대의 것 實즉, 誠이다. 천지에 두루 차서 조금도 빈틈이 없이, 쉼 없이 돌아가며 만물을 낳아 기르고 거두어들이고 하는 것을 보면 주재하는 천리는 誠 자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용』과 『맹자』의

'誠者 天之道(성자천지도: 誠은 하늘의 道이다)'이며,

'誠者는 眞實無妄의 뜻으로 天理의 본연을 가리킨다(誠者는 眞實無妄之謂이니 天理之本然也)'는 집주의 설명이 아닐까.

 

6.3. 意는 일신의 주재자

『중용』 誠之者의 注는, '未能眞實無妄而欲其眞實無妄(미능진실무망이욕기성)'이다.

이것을 설명하기 편리하게끔, '진실무망'에 誠을 그대로 대입하여 줄이면 未能誠而欲其誠(미능성이욕기성)이다.

未能誠은 '아직 제대로 誠이 못됨'이고,

欲其誠은 그러므로 '그것(其)을 誠이게 하고자 함(欲)'이다.

 

무엇이 아직 제대로 誠이 못된 것인가(未能誠). 그것은 意, 사람의 意이다. 또 그 意는 欲其誠에서 其이며 동시에 欲 자신, 欲의 주체이다. 번역을 하면, '意가 아직 제대로 誠이 못되어, 그 意가 그 意(자신)를 誠이게 하고자 함'이다.

意라고 하면 즉각 나오는 설명이 계교상량이다. 주자재 天이야 계교상량이라는 작위가 없지만 사람의 주재자 意는 계교상량이 없으면 주재자 노릇을 할 수가 없다. 意는 意思(계교상량)일 뿐 아니라 동력까지 탑재한 意欲이다. 주재자인 것이다. 意는 誠之의 전체이다.

 

 

6.4. 意는 人中의 천리(意卽理)

앞서 誠이 天 命 性 道 眞 善 美 등과 함께 理를 나타내는 명칭이라고 소개하였다. 誠 天 命 性 道 眞 善 美 등이 모두 理인 것이다. 그런데 '무엇은 理이다' 라고 할 경우, 理의 모습은 여기 저기 자리를 옮겨가며 보아야 한다.

 

- 所以然者(소이연자)로서의 理 개념과 主宰者(주재자)로서의 理 개념:

所以然者(소이연자)로서의 理 개념이 있고, 主宰者(주재자)로서의 理 개념이 있다. 하나의 理이지만 말하는 경우에 따라(보는 위치에 따라) 모습은 다르다. 『중용』 天命之謂性에서 天 命 性이 다 理이다. 그러나 의미는 따져 봐야 한다.

天은 주재자 理이다. 命과 性은 소이연자 理이다. 주재자 理와 소이연자 理의 차이는 兼氣(겸기: 氣을 겸함)냐 對氣(대기:氣를 상대함)냐이다.

주재자 理를 말할 경우는 氣를 겸하여 생각한다. 소이연자 理를 말할 때는 理를 氣와 상대하여 말한다. 理와 氣는 서로 하나(不相離불상리: 서로 떨어지지 않음 non-separate)이면서 둘(不相雜불상잡: 구분가능함 distinction)이다. 理氣를 상대하여 논할 수 있는 것은 理氣가 不相雜(불상잡)이기 때문이며, 兼氣는 理氣의 실재로서 理氣가 不相離이기 때문이다.

心卽理라고 할 경우 이 理는 (제한적 의미의)주재자 理가 아니면 말이 안된다. 제한적이라는 뜻은 주재자 天理에 빗대어 하는 말이다. 心卽理의 心이 바로 주재자 천리가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 心이 주재자 천리에 본원함으로 인하여 주재자 천리然한 무엇이 있는 것일 뿐이다. 性卽理의 理는 소이연자 理이다.

 

- 心卽理라는 표현의 문제:

心은 마음을 표현하는 말 가운데 가장 범위가 넓은 말이다. 理氣를 상대하여 하는 여러 표현 가운데 心卽氣(마음은 곧 기이다)라는 표현도 가능하고 실제로 쓴다. 이러한 상황인데 心卽理라고 하면 반역의 기운이 역연히 느껴진다.

性卽理라는 명제는 원대한 설계를 위한 노력의 위대한 결과물이다. 心卽理라는 주장은, 性卽理를 적용하여 진행 중인 미완의 설계도를 뒤집어 엎는 행위와 다름이 없게 느껴진다. 性卽理는 이미 주재자 天理, 일신의 주재자 心을 전제로 한 상태에서의 '지적 탐구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性卽理를 잡으면 그 안에 양명이 생각하는 心卽理의 의미가 있겠지만 性卽理를 버리고 心卽理만 고집하면 주재자 천리然한 心에 유혹되어 길을 잘못 들 게 된다.

일신의 주재자 心은 천리然한 것이지 천리가 아니므로 본연의 천리를 그 마음(心卽理의 心)의 법으로 삼고 따라야 한다. 천리然한 것은 정확히 표현하면 心이라고 하기보다는 意이다. 천리然은 천리에 본원한 데서 온 표현이고, 천리然한 것이라면 마땅히 천리然의 소이연자인 천리를 법으로 삼아야 천리然을 보존(회복. 誠之)할 수도 있게 된다. 이(誠之)는 事理 당연이다. 천리然한 意가 삼을 천리(의 법), 그것이 바로 性卽理의 性이며 理이다.

 

- 心卽理가 아니라 意卽理:

意는 일신의 주재자이다. 意가 일신의 주재자인 것은 意가 誠에서 본원하기 때문이다. 모든 주재는 비록 未誠일 망정 , 주재자 天理 본연인 誠에 본원하지 않으면 주재가 될 수 없다. 意는 주재자 誠즉理를 본원으로 하기 때문에, 意는 본디는 誠이다. 그로므로, 意는 未誠의 주재자 天理이고, 이런 의미에서 意卽理, 意卽天이다. 주재자 天意는 無爲로서 곧 誠이고, 주재자 人意는 在人者 天理의 誠으로 未誠之天, 未誠의 주재자, 有爲(유위)의 주재자이다. 한자로 쉽게 표현하면, 在天曰誠이며 在人曰意이다(하늘의 誠은 사람에게는 意이다).

誠卽理이며 意卽(未誠之)理이다. 그러므로 誠하게 하려는 意, 欲誠(욕성: 誠之)은 意의 본연이며, 人事之當然이 된다.欲誠은 誠意이다. 誠意라는 조목은 『중용』의 誠之者와 『맹자』의 思誠者 그리고 誠身이라는 표현에 이미 예비된 것이다. 誠之 思誠 誠身은 곧 대학의 誠意인 것이다.

  

6.5. 誠意와 仁

『중용』의 천도를 人道化(실제화: 誠之 또는 誠身)한 것이 대학의 誠意이다. 誠意는 아직 未誠인 意를 誠化하는 일다. 그렇게 하여 意誠 즉, 意가 誠(意=誠 : 意가 眞實無妄한 경지 즉 天誠의 상태를 회복한 경지)이 되면, 합치된 만큼의 意를 仁이라고 한다. 仁(意=誠)의 경지는 규모와 지속성에 있어서 사람마다 차이가 있고, 聖人과 衆人(일반인)의 차이가 있다.

안회 같은 이는 한 석달 仁의 상태가 이어졌다고 하고(回也其心三月不違仁),

그 외의 제자들은 하루에 얼마 또는 한 달에 얼마간 仁의 상태를 유지하는 정도(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라는 말씀이 있다(『논어』「옹야」제5장).

仁의 경지가 三月不違(삼월불위)나 日月至焉(일월지언)의 정도가 아니라 전체적일 때 이런 경지를 聖이라고 하며, 이 경지를 체득한 사람을 聖人이라고 한다. 聖人은, 意=誠인 사람으로서 誠人인 셈이다. 천도로 말하면 誠이며, 人道로 말하면 聖이다. 한자로 표현하면 在天曰誠이며 在人曰聖이다. 옛사람들 소위 성인이 되기 위한 공부가 바로 誠意였다는 것이 이해가 된다.

 

 

7. 誠意와 經


經은 聖人의 意誠한 말씀과 행동들로서 衆人의 처지에서는 誠意하는 좋은 재료가 된다. 성인의 천만언행은 다 誠이며, 이것을 날줄로 삼아 베를 짜는 것은 우리 중인들의 誠意가 된다.